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아시스 Jan 17. 2022

사랑에 달뜨고 삶에 들뜨고

두부같은 하루

"엄마, 누가 우리 셋을 90억에 팔라고 해. 그리고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이야. 그럼 팔거야?"

"응. 팔거야."

고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막내 아들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내 몸을 짓누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돈이 우리보다 더 중요해?"

"엄마가 10년 키웠으니까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한테 가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아."

"난 엄마가 한 말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들은 자신을 판다고 한 내게 이를 갈았다. 하루 뒤.

"엄마, 진짜 이상해. 내 눈이 썩을 거 같애."

눈썹 문신을 하고 집에 돌아가니 아들이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린다. 첫날이라 당연히 짱구 눈썹이 되는 건데 아들은 요란을 떤다.

"엄마, 오늘 바둑 학원으로 나 데리러 오지 마."

"아들아, 너 어쩜 그러니? 엄마에 대한 사랑이 고작 이거였니?"

아들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다시 한 번 더 내게 말한다.

"바둑 학원으로 데리러 오지마. 내가 내려갈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순정파 유지태가 영화 속에서 한 말이 내 머리에 휘돈다. 그 영화를 볼 때는 나도 유지태 마음이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런데 변하는 게 순리였고 자연의 이치였다. 내가 로맨틱한 사랑을 심하게 꿈꿨기 때문이다. 사랑을 삶의 최고의 가치로 우뚝 올려놓은 내 탓이다.


여자들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조금만 가라앉히면 어떨까. 이십대의 내가 사랑해야 했던 건 내 삶이었지 남자가 아니었다. 이제와보니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사방에서 사랑이 넘쳐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쓰고서라도 사랑을 이루고야마는 스토리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그래서 얻은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까. 드라마는 첫키스까지지만 삶은 그 이후다. 사람이 사랑에 달뜬 상태인채로 늘 지낸다고 생각해보자. 몸과 마음이 얼마나 폐허상태가 될까. 사랑만큼 자신을 쉽게 변형하고 변용하며 생명체로 약동하는 느낌을 주는 행위는 없기에 생애 두루두루 사랑을 꿈 꾸지만 사랑은 한 시절의 토막, 토막, 토막 이야기로서가 더 맞는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심지어 엄마와 아들간의 사랑도 눈썹 문신 하나로 틀어질 수 있다. 사랑 할 때는 90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파해도 이별할 때는 사소한 눈썹 진하기로 파탄에 이를 수 있다. 아, 물론 과한 해석이지만 나는 안다. 영원할 것 같은 혈연의 사랑도 이별할 때가 있음을. 아들도 떠나가야 할 사랑이란 걸 알고 있기에 욕심부리지 않는다. 곁에 있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우리의 삶을 창조하고 누리다가 이별할 때가 되면 단호하게 손을 흔들어주는 거지. 이제 너는 나와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 혼자서 삶을 창조해야 한다고, 네 스타일대로 잘 창조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줘야지.


모든 사랑이 사랑할 때가 있고 이별할 때가 있는 법이지. 피붙이도 그러할진대 남과는 어떠할까. 시절인연이 아니면 빗겨가는 거지. 내 사랑과 이별도 받아들여야지. 청춘은 사랑에 달뜨겠지만 중년이 되니 삶에 들뜨게 된다. 중년이 훨씬 좋다. 인생에서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에너지를 거두니 삶이 참 담백해서 좋다. 번민에 휩싸일 필요도 외로울 것도 없이 맑고 깨끗한 청정 상태의 시공간이 펼쳐진다. 흰색 두부처럼. 깨끗한 색에 단백질 덩어리에 양념을 살짝만 해도 가지가지 순한 맛을 내는 두부같은 하루. 내가 벌써 늙은 걸까?^^  지금은 어쨌든 연애보다 하루가 훨씬 더 사랑하기에 근사한 상대다.      

  


작가의 이전글 내 몸은 자연이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