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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Jan 12. 2022

내 몸은 자연이구나

물 한잔 마실 힘

"푸르니(나한송 ) 언제 물 줬지?"

"언제였지?"

둘째딸이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엄마, 우리 조금 있다가 물 주자."

"그래야 하는데."

 

  사실 알고보면 집 안에 햇빛이 걸어들어올 수 있는 면적은 얼마 안 된다. 겨울이 되자 여실하게 다시 느낀다. 길이는 150cm가 조금 넘고 폭은 30cm 정도 되는 창턱이 다라고 할까? 햇빛이 충분히 놀다가는 놀이터로 가장 좋은 곳은 네모진 창턱. 겨울이라 집 안에 들여놓은 화분들은 덩치가 커서 창턱에 올려놓을 수 없어도 집 안 곳곳에서 새잎을 틔워내며 푸르게 자라고 있다. 문제는 작은 화분들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화분들, 선물받은 화분, 이제 막 모종으로 자라기 시작한 허브 화분들, 필히 꽃을 피우고 말겠다고 엄마가 키우는 화분들까지. 화분들을 늘어놓자니 자리가 비좁다. 일주일씩 번갈아 햇빛 놀이터로 데려갔다가 양보시켰다 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     

 

    벌써 3주가 다 되어가나보다. '물 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하면서 물주기를 미뤘다. 내 눈에도 시들시들 마른 잎이 확연하게 보인다. 눈 앞에 두고도 물을 주지 못 했다.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화분들을 부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몇 개의 화분들을 개수대로 가져가 정수기 물을 받아 주기 시작했다. 물뿌리개로 한참을 주는데도 화분 밑으로 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르다. 너무나 목이 말라 뿌리와 흙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아니라 느껴졌다. "너희들 진짜 목 말랐구나. 미안해." 물을 주는 화분들마다 다 그랬다. 갈증이 날 대로 나서 마를 대로 말라서 흠뻑 취하도록 주고 또 주었다. 불성실한 관리자를 둬서 푸른 애들이 고생이구나, 싶었다.


  아침에 고미숙님의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라는 책을 읽다 갑자기 이 책이 내게 보내는 메세지 한문장이 훅 하고 가슴 덤불을 헤치고 들어왔다.

  "내 몸은 자연이구나!"

  내 몸도 뿌리고 흙이었다. 하여 난 물을 마셔야 했다. 가장 필요한 건 물이었다. 이제껏 몸은 오장육부 장기들과 복잡한 혈관들의 미로, 인체 해부도로 펼쳐졌던 과학책의 한 페이지였는데 내 몸은 생명을 키워내는 뿌리고 흙이었다. 이론서에서 실전론으로 넘어왔고 무미 건조한 뼈뭉치, 혈관다발 구조에서 생명을 품고 있는 신비한 세포들의 터로 격상되었다. 몸에 대한 생각이 순식간에 변했다. 기본은 물이었다. 생명이 자라야 하는 곳은 자고로 물이 있어야 했다. 물을 마셔야 했다.


  하루에 물을 2L씩 마시면 피부가 맑아지고 동안이 된다는 기존 썰보다 '내 몸은 자연이다.'라는 깨달음은 내 몸에 더 쉽게 2L의 물을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할 것이다. 몸에 대한 철학 하나 추가! 백날 물을 많이 마시자고 다짐해도 안 되던 일, 그러나 화분의 흙이 벌컥벌컥 물을 마셔대는 입체적인 경험을 내 몸이 생생하게 받아들였다. 또 내 몸이 자연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했으니 난 수시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메마른 흙처럼 갈증에 시달리는 내 몸. "물을 줘야 할 때인거야"라고 내게 말하겠지.


  자연이라고 생각하니 아침도 거를 힘이 났다. 따뜻한 물에 유산균 한 알을 먹었다. 점심 약속이 있으니 아침은 비우면서 몸을 정화시키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가지 생각이 한 가지 힘을 내게 했다. 정말 이상도 하지? 생각은 너무나 어려울 것 같은 식탐에 대한 자제력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린다. 누가 나에게 진즉 좀 알려주지. 알려줬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은 좋은 생각뭉치들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렸겠지. 누구탓도 아니다. 듣지 않으려고 했던 내 오만이 문제인거지. 하나의 좋은 생각은 사람에게 하나보다 더 많은 둘, 둘보다 더 많은 힘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은 생각의 부재, 철학의 빈곤이 문제다. 힘을 내고 싶다면 마음에 와 닿는, 인생 시기와 맞물려 필요한 철학 하나를 쌓아야 할 때인거다.


  '내 몸은 자연이구나.'

  바람 불면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일지, 달콤하기가 그지 없는 고구마를 내는 황토일지, 서늘한 그늘에만 있어서 음습하고 축축한 땅일지, 햇빛을 골고루 받고 비도 적당히 와 주고 적절한 시기에 땅갈이도 해주는 땅일지, 내 몸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틈만 나면 커피를 기웃거리는 내 몸 상태가 어떨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동작 하나도 운동이라고 거부하는 내 몸 상태가 어떨지 상상해 본다. 이럴 때는 철학에 어울리는 이미지도 필요한 법이다. 내가 본 풍경 중 가장 기름지고 윤기나는 흙 위에서 아름드리 뻗어가는 초록 생명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뻗어가는 사진 한 장을 구해야 겠다. 사진을 볼 때마다 사진 위로 내 몸이 오버랩 되겠지. 그럼 난 물 한 잔을 마시겠지.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내 인생 대지 전체를 촉촉히 적셔줄 것만 같다. 까닭은 없다. 왠지 몸의 촉촉함이 마음까지 스며들 것만 같다. 촉촉해지면서 진해지고 번져가는 흙처럼 마음의 영토도 물의 생명으로 진해지며 번져가는 이미지까지 오버랩된다.

  

  그래서일까? 물 한잔, 지금 이 순간은 이 동작 하나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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