봤어? 봤냐고.
전 편과 맥락이 이어질까 싶었는데, 쓰다 보니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정리되는 결과가 재미있는 문장이었다.
오늘의 필사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두려움 그 자체가 당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믿어왔다. 실패할까 봐, 혹은 누군가에게 거절당할까 봐. 그런데 이 문장은 정작 범인은 그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몸집을 불린 '두려움이라는 감정 그 자체'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두려움은 결코 한 가지 색깔이 아니다. 어떤 날은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 같다가도, 어떤 날은 발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질척이는 늪 같기도 했다. 가장 흔하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가로막는 짙은 안개 같기도 하고. 이 수많은 모양의 감정들을 그저 '무섭다'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온 건 아닐까.
재밌는 건,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사실은 '지배당하기 싫어서'라는 역설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방어막을 치는 건데, 정작 그 방어막이 너무 무거워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면? 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내 안의 두려움이라는 독재자에게 항복해 버린 꼴이다.
두려워하는 어떤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두려움에 지배당한 상태도 또 다른 공포가 된다는 말이다. 늪이다 이건.
그래서 의식적으로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실체 없는 미래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잠식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현재'라는 영토로 나를 망명하는 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냉정하게 구분해 보는 것 말이다.
내일의 결과나 타인의 시선처럼 내 손을 떠난 일들은 그냥 두려움의 먹이로 내버려 두려 한다. 대신 지금 내 손에 잡히는 '실체'들에 집중해 본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책상 위를 정리하고, 오늘 필사한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일들.
유령 같은 두려움은 이런 사소하고 단단한 실체 위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거창한 용기를 내려 애쓰기보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실체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 머무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운전대를 다시 내 손으로 가져오는 가장 담백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글을 맺으려다 다시 묻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두려움이 정말 유령 같은 허상일 뿐일까?
내 삶을 위협하는 질병, 당장 끊길지 모르는 생계의 막막함, 소중한 사람의 상실 같은 것들. 이것들은 상상이 만들어낸 안개가 아니라, 내 눈앞에 놓인 '차갑고 딱딱한 실체'다. 이런 두려움 앞에서도 "이건 허상이야"라고 말하는 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실체가 있는 두려움일수록 역설적으로 더 작고 구체적인 '실체적 행동'이 필요하다. 사자가 나타났다면 무서워하고 있을 게 아니라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듯, 진짜 위기 앞에서는 공포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해야 할 과제'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는 위협조차도, 내가 그 무게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그 위협이 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
결국 실체가 있든 없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단순해진다.
이 두려움 앞에서 지금 내가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건,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두려움과 함께 걷되, 내 발걸음의 속도와 방향만큼은 내가 결정하겠다는 단단한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 메모장에는 작은 목록들이 적혀 있다.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작고 소중한 증거들이다.
문장을 쓰며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니, 결국 '지금, 여기'라는 결론에 닿았다. 읽는 이의 마음에는 오늘 어떤 실체들이 적혀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