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하는 일

내가 더 사랑하게 하는 일

by 낭생희

이번 문장을 옮겨 적으며 내 마음에는 스멀스멀 반항심이 돋았다.


오늘의 필사

마음이 흔들리면 활 그림자도 뱀으로 보이고 누운 바위도 호랑이로 보이니 이 가운데는 온통 해치는 기운뿐이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돌 호랑이도 갈매기처럼 길들고 소란한 개구리 울음도 음악 소리로 삼을 수 있으니 이르는 곳마다 참 기틀을 보게 될 것이다.

- 채근담, 홍자성


마음만 가라앉히면 다 된다니. 그럼 진짜 뱀이 나타나도 평온하게 있다가 물려 죽으라는 건가? 이 문장이 세상의 소음을 아예 지워버린 무감각한 상태가 되라는 것처럼 읽혔다.


그동안 내가 써온 글들이 자꾸만 '지금, 여기, 나'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딱히 의도한 적은 없었다. 그저 두서없는 생각들을 텍스트로 꺼내어 정리하고 싶었을 뿐인데, 실타래를 풀다 보면 항상 같은 좌표에 도착해 있었다. 혹시 나는 현실과 단절된 진공 상태의 평온을 꿈꾸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홍자성이 경계한 건 진짜 호랑이가 아니라 내 불안이 빚어낸 ‘바위 호랑이’였다.

그동안 내가 해온 기록들은 거창한 공부를 해서 상처받지 않는 신선이 되려는 노력이 아니었다. 진짜 단단한 상태란 통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되 그 통증에 압도당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낼 줄 아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내 중심을 찾는다는 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그 자극을 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소화하겠다는 다짐이다. 삶은 끊임없는 자극과 정비, 그리고 사랑의 반복이다.

외부에서 날카로운 자극이 들어올 때, 잠시 멈춰 나를 정비하면 그 자극은 더 이상 나를 흔드는 소음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신호가 된다. 내 안으로 들어온 '독'을 성장의 '약'으로 소화해내는 힘. 자극을 안 받는 게 아니라, 자극을 받은 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고르는 일. 이렇게 휘몰아치는 자극에 뽑히지 않으며 세상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나라는 기준을 더 단단하게 다듬는 일.


개구리 울음소리가 음악으로 들린다는 건 소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소리는 여전히 시끄럽지만, 그 소음을 내 삶의 배경음으로 배치할 수 있을 만큼 내 안의 공간이 정리됐다는 뜻이리라. 지나고나서 별일이 아니게 된 일은, 그만큼 내가 지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말처럼 헤맨만큼 내 땅이라니까 맑은 정신으로 헤매야겠다는 생각도 번뜩.

이 많은 자극들을 지금, 여기를 지나는 내가 어떻게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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