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것보다 닫는게 나은 것

떠드니까 재밌었니?

by 낭생희

왜 말 앞에서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는지 다시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였다.


오늘의 필사

말의 크기를 높이지 말고, 말의 품격을 높여라. 꽃을 키우는 건 비이지, 천둥이 아니다.

말하되, 그 말이 침묵보다 아름다울 떄만 하라.

-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이번 필사를 하면서 나는 ‘말을 줄여야겠다’는 다짐보다 먼저,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연애가 화제가 되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가 부풀고, 사실과 추측이 섞여 말이 만들어지고, 정작 당사자가 등장하면 그 말이 옮겨 붙고, 상황이 불편해지면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발을 빼는 사람들.

그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상처 입은 사람만 남는 구조. 나는 그 구조가 싫었다. 정확히는, 책임지지 않는 말이 싫었다.


천둥은 크다. 요란하고, 시선을 끌고, 존재를 과시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키우지 못한다. 잠깐의 공포와 흔적만 남긴다. 반면 비는 조용하다. 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꽃을 자라게 한다. 우리는 종종 천둥의 방식으로 말한다. 흥미를 위해, 분위기를 위해, 관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 말은 빠르게 돌고, 감정은 증폭되고, 그 말이 남길 결과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이 틀어지면 이렇게 말한다.


“난 그냥 들은 얘기였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이제 그만하자. 피곤하다.”


피곤한 건 누구일까. 말을 흘려보낸 사람일까, 그 말 속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한 사람일까. 루미는 말의 크기를 높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제 그 말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건 ‘책임을 높이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은 당사자 앞에서도 할 수 있는가.

내 이름을 걸고도 반복할 수 있는가.

상처가 된다면 내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말이라면 침묵이 더 낫다.


나는 더 이상 천둥의 말에 박수 치고 싶지 않다. 요란한 정의감도, 가벼운 관심도, 타인의 삶을 소비하는 대화도. 말은 결국 태도의 문제다.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고, 관계를 대하는 방식이며,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끼기보다는 말을 단단하게 하고 싶다. 조용하더라도, 느리더라도, 누군가를 자라게 하는 말. 그리고 필요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택까지도 포함해서 침묵보다 아름다울 때만 꺼내는 말. 그 정도는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태도이니까. 어쩌면 지난 관계가 내게 남긴 유일한 수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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