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화나 있지만, 어떤 모습일지 선택하는 거지
필사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는 자꾸만 마음을 세우고 태도를 바로하게 된다. 충동적인 내가 나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도록 훈련하는 기분이다. 단순 자기 검열이 아니다. 아무도 잔소리해주지 않는 나이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채찍과 당근 정도?
오늘의 필사
착하게 살아라, 다정한 이여.
똑똑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고귀한 일을 꿈꾸지 말고,
그냥 하루 종일 고귀하게 살아라.
그러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너머까지
하나의 크고도 부드러운 노래가 될 것이다.
‘착하게 살아라’ 같은 말은 여전히 나를 조금 불편하게 만든다. 착한 게 뭔데. 누구 기준인데.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데. 다정한 사람이 되라는 말도 그렇다. 세상은 그렇게 다정하지 않은데 나만 계속 부드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한 적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조금 더 똑똑해지려고 했다. 덜 당하려고, 덜 흔들리려고, 덜 상처받으려고.
‘고귀한 일을 꿈꾸지 말고, 하루 종일 고귀하게 살아라.’ 이 말은 거창하지 않아서 더 불편했다.
대단한 목표도, 빛나는 결과도 필요 없고 그냥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서 도망칠 구석이 없다.
진흙탕 싸움을 하더라도 지키고 싶은 순간과 굽히기 싫은 자존심이 있었다. 근데 이번 연재를 통해 필사를 계속하다 보니까 이상하게도 자꾸 같은 지점에서 걸렸다. 대단한 사람이 되라는 말보다 어떤 태도로 살 거냐는 질문. ‘고귀한 일을 꿈꾸지 말고, 하루 종일 고귀하게 살아라.’ 이 문장이 불편했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마도 이번 필사문장의 첫 표현인 '착하게 살라'는 말은, 정말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태도를 선택하라는 말에 가깝게 보였다. 어떻게 반응할지, 어디까지 무너지지 않을지, 어떤 방식으로 버틸지. 그걸 매일 고르는 일.
거창한 목표나 대단한 결과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마다의 선택들이 결국 나를 만든다는 것. 삶과 죽음, 그 너머 같은 건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오늘도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조금 덜 계산할지, 조금 더 날 세울지,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러워질지. 대단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선택한 태도로 하루를 끝내는 것. 요즘의 나는 여러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나와 내 삶을 어떻게 대할지 다독이며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