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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05. 신의 말씀이 사람으로 전해지네.

어느 작가의 글은 담백하고 일상적인데 깊이가 있다. 자신을 대중에 그대로 벗겨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아들을 마주해야만 했을까. 그 고통을 거치고 걷어내 탄생한 글에는 내세움이나 화려함은 없고 그저 담담한 자기 고백만이 있을 뿐인데도 그 진고의 진동은 종이를 타고 공기를 타고 전해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산책길에 스쳐 지나간 자연의 장면이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잔상과 여운이 영혼에 남아있는 것과 같다. 감동은 남지만 그때의 장면과 여운이 말로 표현이 안되어, "아- 좋다"는 외마디 정도 가까스로 내뱉는 것은 나다. 작가만큼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기에 공들이지 않는 자의 한계일 것이다.


"말에는 한계가 있다"며 언어로 전달되는 것을 심히 낮게 본 적이 있다. 20, 30대쯤 이야기이다. 주장하는 열정은 더 이상 없으나, 그 생각은 늘 한편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박완서 작가님을 존경한다. 그분의 글은 마치 마음의 고향 같다. 그 시대를 겪지는 않았지만 단어와 문장들의 담백한 표현력에 매료되었었다. 고등학교 때 그분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말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한 단어 선택에도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장편을 완성해 낸다는 말씀에, 아! 진심이 독자에게 닿는구나 하여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라캉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나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정신분석을 모두 언어화하겠다는 집념으로 학자로서의 일생을 바쳤다.


누군가는 세상에 닿을 언어에 이렇게 진심을 다하는데, 또 누군가는 실언과 망언으로 의도치 않게 공격하고 상처를 준다. 그런데, 상처되는 말도 때로 세상을 보는 반응을 드러내는 좋은 도구가 된다. 화가 나거나 비난하거나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거나, 또는 행복해지거나 기쁘거나 힘이 되거나. 물에 작은 돌이 튀어야 파동이 생기고 물을 자꾸 들여다본다.


나에게 상처 주었던 말들은 깊고 오래 남아, 그에 반응하는 나를 두고두고 분석하기에 좋은 재료가 되곤 한다. 아픔을 자각하고, 그 반응을 해석하고, 성찰하고 단단해진 나는 이윽고 그에게 감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정성을 다해 우려낸 말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실언도 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번역글 말고 작가의 문체를 직접 읽고 싶은 갈증이 나기에 오랜만에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니, 지리산 한 자락 바람결에 몸 담그고 온 듯한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언어의 신비로움과 소중함이 새삼 느껴지기에 오늘의 일상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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