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막막한 독서>를 읽었다. 내가 원하던 책 읽기란 이것이었다! 라며 아이처럼 기쁘게 읽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에 세계문학전집에 빠져있었는데, 그즈음 대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을 간다면 세상 사람들과 고전문학 속 의미와 감동을 토론할 수 있겠구나!'라는 설렘을 갖기 시작했다.
나의 오랜 기대는 좌절되었다. 고등학교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수업 방식에 실망했고, 분노감에 나는 한동안 크게 방황을 했었다.
<막막한 독서>를 재밌게 읽다보니, 낡은 서랍 구석에 파묻힌 그때 대학시절의 기억이 스물 스물 떠올랐다.
나는 왜 세상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분노했을까?
왜 특정인(대학)이 그것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했을까?
다음은 <막막한 독서>의 작가 '시로군'에 대한 소개글이다.
독서모임진행자. 느리게 읽는 사람.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세계문학 읽기 모임 [막막한 독서모임], [한 책 읽기]의 기획과 진행을 맡고 있다. 릴케와 울프에게서 초조해하지 않고 느리게 읽는 법 과 한 장면에 오래 머무는 법을 배웠다. ‘닥치는 대로 많이 읽기’와 ‘파헤치듯 꼼꼼히 읽 기’의 과정을 거쳐 요즘은 ‘함께 읽기의 즐거움’을 멤버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중이다.
같은 꿈을 꾸었던 두 사람이 있었다.
시공간이 한순간에 연결되는 감동,
수백 년 전 작가와 내가 어느새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몰입의 순간들,
책 속의 세상 그리고 세상 속의 소설들.
그 속에 펼쳐지는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었다.
한 문장에 천천히, 함께 머물러 보고 싶었다.
내 좁은 시야를 넘어서, 소통을 통해 확장되는 기쁨과 깨달음의 환희를 갈망했다.
같은 꿈을 꾸었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함께 읽자'라고 사람들 앞에 나서고 파고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왜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느냐'라고 분노하고 원망했다.
한 사람은 시도, 좌절, 희망, 기쁨의 역사를 써 내려갔고, 다른 한 사람은 분노와 원망의 기억을 되풀이하며 그 희망을 스스로 꺾어버렸다.
저 너머 활짝 열린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분노였다.
세상이 이래서, 나는 부족해서, 타인이 이래서 저래서 불평하며 키우던 화는 내 마음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고 기회의 땅을 볼 수 있는 시야를 막아버렸다.
<막막한 독서>를 읽으며, 책을 사랑했고 현실에 분노했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날 듯 낡은 기억 속의 내가 쑥 올라온 김에, 먼지를 털고 요리조리 들여다 본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비춰본다.
우리는 분노 속에 갇혀 버리진 않았는가?
나아갈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