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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글을 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것은 가장 나 다운 모습 그대로 세상 앞으로 반보 나가보는 용기이다. 얼굴 없이 신분도 없이 나가는 것이니 반보가 맞다. 나를, 아니 내 페르소나를, 아는 이들은 '나는 내향인이다'라는 말에 그럴 리가 없다고 크게 손사래를 쳤다. 실은 내 안에는 늘 숨고 싶고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안'과 '밖'이 어찌나 다른지, 어두운 '안'은 어디서 온 건지, 그 괴리가 혼란스러운 지경이다.


그러니, 누군가 우연히 내 글을 읽으면 괜히 부끄러움이 올라오는데, 좋아요나 댓글에 그 부끄러움을 이길 용기를 얻는다. 이곳에 글을 내어보는 것은 그렇게 스쳐가는 이들의 응원과 위로를 얻어, 나답게 살 용기를 내 보려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우연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 않는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행인의 행동에 자살하려던 마음을 접고, 별 뜻 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 어떤 이의 지친 마음을 녹여 하루를 살게 한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짧은 인연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 그렇게 위로와 힘을 얻는다.


나는 표현을 참 못한다. 영어를 해야 밥벌이를 하는 사람인데, 영어 실력은 차치하고 언어화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어도 엉망이다. 남편과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 일이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여 여러 부분을 휙휙 건너뛰니, 각자 추측하여 듣기가 자기 맘대로다. 주어가 빠질 때도 많고, 무슨 말을 하는지 맥락을 잃기도 한다. 했던 말의 숨은 뜻이나 단어를 찾아보며,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냐며 배꼽이 빠지게 웃는 일도 있다.


40대가 되어서야 말이 트였다. 말로 밥 벌어먹고살았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싶겠다만, 회사 일이나 남의 것을 설명하는 것은 기똥차게 해도,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완벽한 마비 상태였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면의 나를 하나씩 만나고 눈물 몇 다라를 쏟아내고 나서야 조금씩 말을 뱉기 시작하였다. 이제 시작한 '안'의 언어는 어버버 하는 수준인데, 이게 '밖'의 언어와 섞이면서 언어 체계가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서울 길동의 골목서점에서 하는 작가와의 만남에 간 적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쓰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혼과 우주의 공간에서 창조적인 감각에 휩싸여 있다가, 이것을 작은 종이에 담아내고 나면 그것이 하찮거나, 과잉된 것을 걷어내야 하거나, 표현이 안되기도 한다. 자신의 추장적 세계를 세상의 언어로 변환해야만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기에, 제삼자의 검수, 수차례의 재고를 통한 언어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의 분노와 거부, 인정과 수용이 일어난다고 했다.


나의 언어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안'의 충만한 깨어남과 '밖'의 세상의 언어가 균형을 이루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로 태어나 옹알이를 시작하고 있으니, 이제 언어화 훈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의 주 과정은 언어화이다. 자신의 기억, 가치, 감정 등을 언어로 쏟아내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쌓은 것들이 해갈되고, 오류, 과장, 망상을 덜어내게 된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상담가에게 털어놓았다. 처음엔, 오랜 시간 닫힌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한 문장도 꺼내기가 힘들어서 외마디 정도 겨우 했던 것 같다. 내가 닫히기 시작했던 것은 기억하기에 한 5-6살쯤부터였던 것 같다. 삶이 힘들다며 나를 밀어내고 억압하는 엄마 앞에서, 나의 행동과 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엄마를 만족시키는 것 같았다. 책도 숨어서 읽고, 잘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드러내지 않고, 입은 다물고 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기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은 과장되고 시간을 따라 왜곡되었을 테니 더 이상 의미가 없기도 하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형성된 내 모습을 인지할 뿐이다.


글을 쓰는 것은 아예 소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책 읽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난다. 그게 밥이나 잠 보다도 좋았다. 일찍 자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작은 등을 켜고 책을 읽는다. 무심코 핀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바리에서 성적 묘사를 마주친 날은, 내용은 이해도 못하면서 보면 안 될 것 같은 것을 본 듯 가슴이 콩닥콩닥하여 괜스레 어른들 눈치를 보기도 한다. 눈에 그리 띄지 않는 작은 소녀에게 책은, 남몰래 빠져드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그 속엔 가보지도 못한 먼 나라들의 도시와 바다와 숲을 놀이터 삼게 하고, 18-19세기의 세상을 현재로 돌려놓는 기적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파란 스크린에 모임 후기, 일상 공유 같은 짧은 글을 적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 한 친구가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글 쓰는 연습 하느라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냐며 시샘 어린 비하를 하였다. 그리고, 내 낮은 무의식에 큰 자극이 되어 글쓰기를 멈추었다.


영어가 왜 이렇게 막히지? 아니, 한국말도 왜 이리 꼬이고 정리가 안 되는 거야? -에서 시작된 생각에 대한 답으로 매일 글쓰기를 해보려고 한다. 마구잡이 글이긴 할 것 같다.


매일 쓰기를 '왜' 하려는가에 대한 말이 이리 길었다. 이리 길고 무거운 말들을 여기에 비워내면, 입에서는 좀 더 가볍고 단순한 언어들을 다룰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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