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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08. 갑자기?! 산티아고 길위에 서다.

생각은 잠시 멈추세요.

전 직장과 새로운 직장 사이에 2주간의 시간이 생겨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그 길이 떠올랐다.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즉흥적으로, 너무도 갑자기! 2주후 나는 그 길 위에 서있었다. 


산타이고 순례자의 길은 묘한 힘이 있다. 


장소가 주는 에너지일 수도 있고 또는 걷기의 힘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길위를 걷는 이들은 모두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 하다.  '까미노 블루'란 그 길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길을 그리워하는 증상을 말한다. 내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 보던 그 순간,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곳에 할 일이라고는 걷기 뿐이니 계획을 세우거나 복잡할 것도 없다. 아침에 눈 뜨는 대로 커피 한잔 하고 바로 길을 떠난다. 해가 중천에 떠나고 싶으면 그런데로, 새벽에 몸이 일어나지면 또 그런데로 가면 된다.


그리고 오후 3-4시쯤 되면 지나던 마을에 있는 빈 숙소를 잡는다. 하루는 숙소에 짐을 풀고 쉬는데 한 한국인 20대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여기까지 왔으면 뭔가 생각을 해야할 거 같은데 뭘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 질문이 재밌기도 해서, '저도 아무 생각 안하는 것 같네요' 라고 웃어주었다. 그래도 그의 질문 덕분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무엇을 하며 걷고 있는 거지? 


몸이 약했던 내가 이렇게 한걸음씩 내 딛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내 발끝을 바라보는 것.

평화롭고 아름다운 주변 풍경 둘러보는 것. 

그리고, 온 김에 내 낮은 자존감 살려보자 싶어서 '난 멋져' 를 사람 없을 때마다 크게 외치는 것. (그리고는 우껴서 키득대는 것.)


그렇게 1주일 쯤 걷던 중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예전에 나를 뒷담하고 질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하도 특별할 게 없어서 원래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그러려니 지나간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중에 그 때 상처받고 화가 났던 내 감정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화가나고 답답한 내 마음이 선명하게 보였다. 느낀다기 보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좀더 맞는 표현이다. 마치 내 마음이 영사기를 돌려 상영하고 나는 관객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영사기가 그의 마음도 보여 준다. 그는 잘 나가는 형이 좋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비교되어 주눅이 들었다. 까불까불 재롱과 재미있는 말을 많이 해서 관심을 받던 아이에게는 차마 표출하지 못한 질투심이 무섭게 눌려있었다. 


그 일은 아주 오래 전이라 내 마음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흘러 가는 일상에서 무심코 흘려버리고 다독이지 못한 마음들이 하나씩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거지, 괜찮아" 라는 말은 어떤 때는 진심어린 공감과 위로일 수 있고, 상황에 따라 화를 마주하지 않고 빨리 상황을 넘기고 싶은 이성적인 압력일 수 있다. 


가끔 생각과 이성을 멈추고 나에서 밖으로 또는 오롯이 내 안으로 시선을 옮겨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매일 반복되는 단순함, 생각의 멈춤은 마음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생각은 잠시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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