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의 이야기
처음 그 애와 급식소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은 그날 이후, 학교 안에서의 대부분을 우리는 함께 보냈다. 쉬는 시간이면 늘 삼반 복도 끝으로 향하던 발길이, 언제부턴가 자연스러운 습관처럼 굳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땐, 나는 괜히 물을 마시는 척, 수도가 옆에 멈춰 서 있었고, 급식소에서는 꼭 그녀보다 먼저 식판을 들고 기다렸다. 체육 시간엔 우연히 같은 운동장을 쓸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줄 끝에 서서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청소구역이 겹치는 날이면 먼지를 천천히 쓸다 말고, 창틀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멈춰 있기도 했다. 그 애가 교탁 앞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면, 나도 무심한 척 그 자리에 고개를 숙였고,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같은 물건을 고르다 마는 일도 자주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애와 내 사이에는 그런 날들이 켜켜이 쌓였다. 모르는 척하면서도 들키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그 애는, 밥을 먹을 때 늘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반찬을 말없이 건넬 때는 입술 한쪽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 냅킨을 꺼내 무릎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해 여름, 그 애는 복도에서 늘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녔다. 팔꿈치에는 자주 연필 자국이 묻어 있었고, 손끝으로 그 자국을 지우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던 눈빛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내 머릿속의 추억의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우리는 사 학년, 오 학년을 그렇게 지냈다. 주말이면 동네 놀이터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앉아 슬리퍼 끈에 발을 얹은 채 그네를 밀었고, 흙먼지를 털며 서로를 놀렸고,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기도 했던- 별일도 없던 그날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스며있었다.
육 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그 무렵 그녀에겐 친구들이 많이 생겨 있었다. 나는 이제 굳이 그녀의 자리를 찾지 않아도 됐다. 그녀는 어느새 내가 없더라도, 자리를 잘 지켜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투며 웃음소리며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여전히 내 하루의 중심에 머물렀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활발했다. 조잘조잘 말을 걸었고, 자주 웃었고, 어떤 날은 나보다 먼저 장난을 걸었다.
나는 그 애를 봄날 반쯤 열린 창 너머로 스며드는 빛 같다고 생각했다. 금세 사라질 것 같으면서도, 한참이나 남아 맴도는 한빛. 살갗에 닿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그런 무늬로, 조용히 내 시간에 번져 있었다.
어쩌면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마음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다만, 그냥 그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우리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여중과 남중으로 갈라졌다. 학교는 달라졌지만,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아침이면 같은 골목에서 마주쳐 함께 걷고, 저녁이면 똑같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헤어졌다.
각자의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다가도, 시험기간이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고, 같은 문제집에 연필 자국을 남기며 밤을 새웠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면 짝사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웃었다. 물론, 그건 언제나 그녀 쪽에서의 일이었다. 농담처럼 시작된 말들이, 어느 순간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중학생이 된 그녀에겐 짝사랑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 동아리에서 만난 한 살 많은 선배, 팬카페에서 알게 된 묘령의 남자, 우리 학교 농구부 선수까지- 참 많이도 좋아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 좋다고 했다. 가슴이 뛰고, 밤에 혼자 음악을 들으며 그 사람을 떠올리는 그 시간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런 상대가 생길 때마다, 그녀는 꼭 내게 달려왔다.
운동장 계단에서, 동네 피자집구석 자리에서,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채- 손을 휘젓고,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말은 끊이지 않았고, 웃음은 자주 터졌다. 나는 그 옆에서, 괜히 물병 라벨을 뜯고 있었다.
그녀가 그 감정에 대해 말할수록, 내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씩 차올랐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무언가가 미간 어딘가를 자꾸 눌러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웃는 얼굴이 더 이상 예전처럼 그렇게 반짝이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