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지 못한 감정

by 이랑

취미로 시작했던 글쓰기가, 어느새 직업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점점 더 집 안에 스며들었다. 재하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붙잡았다. 전화로 일을 조율하고, 메일로 사람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은 고요에 기대어 흘려보냈다.


원고지와 노트, 문구류들이 집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소파 옆에는 마지막 퇴고를 마친 원고 뭉치가 묵직하게 쌓여 있었다. 가끔은 이 고요가 나를 잠식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살고 있다는 감각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게 조용히, 너무 쉽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익숙함에 기대어 자꾸만 재하를 찾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고, 숨이 목구멍 깊숙이 닿는 듯했다. 책상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연락처를 넘기던 손끝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걸렸다.


‘석호 선배.’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외쳤다.

“선배, 나… 남자!”


그 말은 거의 외침처럼 튀어나왔고, 그는 반 박자 늦게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쁘게 유쾌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조금 놓였다.


연애를 하지 않은 지 벌써 삼 년이 넘었다.

나는 십 년 가까이 재하를 사랑했다. 그 사이 두세 번의 연애도 있었지만, 누구와 함께 있어도 마음 한가운데엔 늘 그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순간이 거짓은 아니었다. 함께 웃었고, 진심으로 설레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중심은 언제나 그에게 기울어 있었다.


이제는 알겠다. 더 이상 재하를 얻기 위한 연애가 아니라, 그를 잊기 위한 연애가 필요하다는 걸. 내 온몸이, 진짜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는 걸.


“선배, 어디 남자 없어?”

“내 주변은 다 장가갔거나, 갈 준비 중이지. 나만 애인도 없이 혼자야.”


나는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엔 다시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벽에 걸린 메모지가 바람결에 살짝 흔들렸다. 그 조그만 움직임이 왠지, 웃기고 슬펐다.


“나 이제 망한 거야?”

“나도 아직 싱글인데? 난 어때, 봉우야.”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장난 같지만, 어쩐지 힘이 빠지지 않는 말투. 기분 나쁘게 유쾌하고, 또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


“장난치지 마요. 나 진지해요, 선배.”

“넌 동아리도 없고, 모임도 안 나가고, 회사도 출근 안 하잖아. 사람 만날 기회가 어디 있겠냐?”


그의 말엔 약간의 답답함이 묻어 있었고, 나도 그게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 자신이 가장 답답했다. 그래서 더 웃겼다.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진짜로 망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조금 설렜다.


“그러니까요. 나 진짜 뭐 하고 산 건지 모르겠어요. 진짜 재미없어, 남봉우.”

내가 나를 비꼬듯 말하자, 그는 금세 받아쳤다.

“봉우야, 너 진짜 변화가 필요해. 심각하게.”

“나도 알아요.”


말은 가볍게 뱉었지만, 속은 뻐근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이었다.


“찾아볼게. 너보다 어려도 괜찮으면, 있긴 할 거다.”

“나 이재하한테 선전포고 했어요. 이제 안 좋아하겠다고.”


그가 웃었다. 숨도 들이쉬지 못한 채 터져 나온 웃음. 목소리보다 먼저 새어 나온 호흡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진짜-”

그는 끝말을 잇지 못한 채 웃음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다짐이 웃겼던 걸까.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 웃음에서 정확한 뜻은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웃음이 싫지 않았다. 가볍게 떨어졌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에게 토닥인 것처럼, 조금은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탁, 미약한 소리가 책상 위로 번졌다. 그 소리마저도 방 안의 정적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랍을 열어 아무 셔츠나 꺼내 입고, 바닥에 나뒹구는 청바지를 주워 올렸다. 움직임은 굼떴고, 발끝엔 질질 끌린 먼지가 따라붙었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고 나서야, 비로소 거울을 바라봤다. 텅 빈 눈. 아무 표정도, 기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갈 곳도, 가야 할 곳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신발을 꺼내놓고, 발을 밀어 넣었다. 그저 이 방 안의 고요를 어떻게든 부수고 싶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무너질 것 같았다.


현관 앞에 섰을 때, 어깨끈이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가방을 다시 들어 올리려다 말고, 잠깐 멈췄다. 뭔가 잊은 듯한 기분. 그리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감각 하나가 있었다.


선생님이 건넸던 종이.
마지막 상담 날, 조심스레 내밀었던 안내문.


나는 가방을 열었다. 안쪽 주머니를 뒤적이는 손끝에, 바삭한 감촉이 스쳤다. 아주 얇고 낯선 감촉. 종이를 꺼내 펼쳤다. 모서리는 다소 구겨졌고, 몇 번 접혔던 자국이 얇게 남아 있었다. 손바닥 위 종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읽었다.


[치유의 모임]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그 문장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날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그 이야기는 더는 하지 말자.”

재하의 입에서 떨어져 나온 그 말은 명령도 부탁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이상하리만큼 단단하게 가슴에 박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 그 이야기는 영영 입 밖에 나서지 못한 채 남았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잊히지 않은 말. 흐르지 못해 멈춰버린 감정.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의 한 귀퉁이를 여전히 붙든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떠나지 않은 감정.
끝나지 않은 이야기.
흐르지 못한 채, 조용히 남겨진 것들.
그게 나를 이루고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약속이 아니라 금기였다. 지켜야 해서가 아니라, 입 밖에 낼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웠고, 입 안에서조차 맴도는 일이 드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 물 위에 떠 있던 먼지처럼 천천히 가라앉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 기억은 아무 말 없이 자라났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이, 내 안 어딘가에 조용히 뿌리를 내린 채로.


손에 들린 종이가 작게 떨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이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안에 선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서 있었지만, 숨도, 말도, 감정도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가, 낯선 사람들 앞에 앉아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말의 처음, 소리의 가장자리. 그 막막한 지점을 건너는 일.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더 괜찮을지도. 그들이 모르는 감정이니까.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종이를 다시 접었다. 구겨진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선을 맞췄다. 그리고 무심히, 가방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마침 시계는 다섯 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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