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침묵보다 더 시끄럽다
그는 잔을 들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 드라마가… 결국 그 사람 이야기잖아요. 작가님 소설에 나오는 그 남자.”
나는 짧게 웃었다. 굳이 부연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가 ‘그 사람’이라 부른 그 남자. 그리고 내가 그려낸 그 남자. 딱 잘라 누구를 떠올리며 쓴 건 아니었지만, 실은 내 안에 오래 눌러앉아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나일 수도- 혹은, 내가 한때 사랑했던 누군가였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좀 더… 밖으로 끌어내도 괜찮을까요?”
그 말은 연출에 대한 제안처럼 들렸지만, 그 시선엔 어딘가 더 깊은 게 묻혀 있었다.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은 내 안쪽을 은근히 더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로 말하고 있던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쓴 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틈을 그렇게 정확히 짚어내는 사람을 마주하면 순간적으로 방어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네요.”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딱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가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이든, 나는 작가가 아니라, 그냥 ‘남봉우’로서 대답했다.
“지금은 너무 안으로만 숨어 있는 것 같아서요. 눈빛이나 행동만으로는… 다 보이지 않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조금은 열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보는 사람도 따라갈 수 있도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대답과는 달리, 정작 마음은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열어도 되는 걸까. 아니, 더 열 수 있는 걸까. 그 사람을 꺼내어 타인의 시선 앞에 놓는 일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내가 그를 그렇게까지 바라볼 자격이 있었나 싶기도 했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글도 그를 온전히 담아낸 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숨기려 했던 건 아니다. 그 이상은 쓰지 못했던 거다. 쓸 수 없었던 마음이, 더 많았기 때문에.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커피가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어느 정도는 괜찮아요.”
말끝이 조금 늦게 흘러나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신 뒤, 쓴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식었네요.” 말끝에 피식 웃음이 섞였다.
“차라리 아이스로 할 걸 그랬어요. 작가님은 왜 뜨거운 거 드셨어요?”
“감독님은요?”
나도 따라 웃으며 반문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이번엔 말투가 살짝 바뀌었다.
“이 주인공, 대체 얼마나 혼자 끙끙 앓게 할 건가요? 이렇게 다 삼키고 살면 속에 탈 나요.”
그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 생각 끝에 잠시 재하가 스쳐 지나갔다.
“있죠. 근데 보세요, 작가님. 보통은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장면이 꼭 있잖아요. 근데 이 사람은 자꾸 도망가고, 숨기고… 보는 입장에선, ‘아니 이 사람 뭐야, 왜 이렇게 혼자 힘들어해?’ 그럴 수도 있단 말이죠.”
그는 마치 진심으로 걱정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쿨한 척, 조용한 척하다가 진짜 감정은 못 보여주고 지나가는 캐릭터들 있잖아요. 그런 거 안타깝단 말이에요.”
“그래서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작가님은 이 사람을, 진짜로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직 다 말을 안 한 건지.”
그의 질문이 끝나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은 맛이었지만, 그걸 핑계 삼아 대답을 미뤘다.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나조차도 끝까지 들여다보지 못한 부분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걸까.
“그냥, 그런 사람인 거죠.” 나는 조용히 말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표현한다고 믿는 사람.”
“음… 그렇긴 한데요. 그걸 사람들이 알아채주면 다행인데, 못 알아보면 어쩌죠? 속에 쌓이기만 하다가, 나중에 터지는 거 아닌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엔 터지라고요. 그래야 드라마가 되죠.”
내 대답을 들은 그가 픽 웃었다.
“아, 사람 하나 고장 나도 좋으니까 드라마만 잘 나오면 된다 이건가요?”
“제가 그 정도로 나쁘진 않아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가볍게 꼈다.
“고장까지는 안 나게 써놨어요.”
그는 다시 대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근데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더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 남자 주인공이요. 모델 있죠, 그렇죠? 딱 보면 알아요. 말투, 행동, 디테일까지. 그냥 지어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아주 천천히,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런 거 없어요.”
눈을 피한 건, 습관이었다.
대답은 툭 던졌지만, 눈동자는 딴 데로 갔다.
“작가들이 다 그렇죠 뭐.
없는 사람처럼 쓰는 게 제일 어렵잖아요.”
이건 거의 속담처럼 외워둔 문장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역시.”
그 말투는 실망보다 납득에 가까웠고, 그 표정은 웃음보다 알아낸 사람의 여유 같았다.
“안 알려주려는 거 보니까, 진짜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실었다. 나는 굳이 웃지 않았다. 굳이 아니라, 그냥 안 나왔다. 굳이 부정도 안 했다. 잔 안의 커피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로 햇빛이 아주 얌전히 누워 있었다. 깊은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들킨 것도 아닌데 그가 웃는 얼굴 너머로 뭘 꺼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말끝이 자꾸 진지했다. 장난처럼 던지는 질문의 간격이 은근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통해 나는 그가 이 드라마를 꽤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끼는 걸 넘어서, 제대로 읽고 있다는 것도. 그게 좋았다. 내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한테는 정확히 닿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였을까. 별 얘기도 안 했는데, 괜히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이름만 아는 사람이, 조금은 아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한참 전부터 식어 있던 커피잔을 괜히 들어 올렸다가, 내용물 없는 잔을 보고는 다시 조용히 내려놨다. 잔이 아니라 손에 남은 건, 어정쩡한 습관뿐이었다. 그러더니 의자를 끌어당겼다. 꽤 느긋하게, 별생각 없이 앉은 사람처럼. 그리고는 상체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근데, 작가님- 혹시 배 안 고프세요?”
그의 말에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좀 고픈데… 혹시 다른 스케줄 없으시면, 밥이나 먹으러 가실래요?”
그 말이 생각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대답을 깜빡했다. 누가 봐도 데이트 신청은 아니었고, 의도나 계산도 딱히 없었다. 그냥 오래 앉아 있었으니까, 이제 좀 자리 옮기자는 느낌.
“괜찮은 데가 있으면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떡 일어났다.
“좋아요. 하나 있긴 해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말끝이 살짝 자랑처럼 들렸다. 그는 컵을 정리했고, 정리한 컵이 든 쟁반을 들어 올린 채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걸었다. 나는 그보다 조금 느리게 따라 일어났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앞서 걷는 그의 어깨가 적당히 멀어졌다가, 내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는 그 리듬이 괜히 마음에 맞았다.
“여기 진짜 맛있어요. 혼자서도 자주 와요.”
식당은 스튜디오 근처, 골목 안쪽으로 조용히 숨어 있는 작은 가정식 식당이었다. 겉에서 보기엔 별거 없어 보였지만, 문을 여는 순간, 된장국 냄새랑 묘하게 섞인 뭔가가 코를 툭 건드렸다.
그가 익숙한 걸음으로 안쪽 구석 자리를 향해 걸었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고,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려놓기도 전에 그는 제육 하나랑 김치찌개요. 공깃밥은 두 개 주세요,라며 벌써 주문을 마쳤다. 그렇게 말한 뒤,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걸로 시켰는데, 괜찮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물컵을 들어 올려, 천천히 내 앞으로 밀었다. 컵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가, 내 손끝 앞에서 멈췄다. 그제야 그는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앉았다. 살짝 기울어진 자세, 팔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시선은 조용히 내 얼굴을 향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작가님, 오늘은 좀 다르신 것 같아요.”
그가 내 얼굴을 슬쩍 훑더니 말했다.
“처음 뵀을 땐, 거의 말을 안 하셨잖아요.”
나는 물컵을 잡았다가 말았다.
“말 시키는 사람이 달라서요. 그땐 감독님이었고, 지금은, 남우 씨니까.”
“제 이름 기억하신 거예요?”
그가 작게 웃었다. 은근히 신난 얼굴이었다.
“몇 번이나 들었는데요. 잊는 게 더 이상하죠.”
그는 잠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에 있던 냅킨을 괜히 접었다 폈다. 그 틈에, 나는 앞에 놓인 냅킨을 반듯하게 펼쳐 무릎 위에 얹었다. 별생각 없는 듯한 손놀림이었지만,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여전히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내쪽을 힐끔 봤다.
“습관이에요?”
“아, 네. 뭐 그런 셈이죠.”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괜히 젓가락을 한 번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움직임이 조금 느슨해진 걸 보니, 식사 전에 감돌던 긴장도 약간은 풀린 듯했다. 식당 안은 조용했다. 작은 TV 에선 뉴스 자막만 무성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잠시 뒤, 반찬 몇 가지와 함께 김치찌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국자를 들어 찌개를 천천히 떠내 내 앞 그릇에 담아주었다. 뜨거운 국물이 사박사박 바닥을 적셨고, 된장보다 진한 김치 향이 곧 공기 속으로 퍼졌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릇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두었다. 그 모든 동작이 익숙하다는 듯, 말 한마디 없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먼저 먹어요.”
그가 찌개 냄비를 옆으로 밀며 말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떠보려다 말고, 그가 나를 슬쩍 보는 걸 느꼈다. 입꼬리 한쪽만 가볍게 올린 얼굴이었다.
“근데 작가님, 진짜로 모델 없어요? 남자 주인공 말이에요.”
말투는 장난처럼 들렸지만, 눈빛은 제법 조심스러웠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김치찌개 안에 잠겨 있던 고추 조각을 가만히 저었다. 한참을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럼… 그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닌 사람?”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밥을 한 숟갈 떴다.
“음식 식어요.”
입에 머금은 말들을, 그 한마디로 덮었다.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밥을 먹었고, 그 틈에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짧은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아, 맞다.”
찌개를 한 숟갈 더 뜨던 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쓰신 에세이집도 읽었어요. 제목이… 물속에서 가장 멀리였죠?”
나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책이요?”
“네. 작가님이 쓰신 에세이잖아요.”
당황스러움이 살짝 스치며 말이 잠깐 끊겼다.
그 책은, 공식 출간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만큼 조용히 나왔던 책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에서 내부 실험 프로젝트처럼 진행된 소규모 단행본. 기획도, 디자인도, 제목도 어딘가 어정쩡했던, 몇 백 부만 찍혀 나와 창고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잊힌 책. 내 이름이 붙긴 했지만, ‘작가’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어색하던 시절이었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을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그 책은 진짜 아무도 모르는데요.”
나는 물컵을 다시 손에 쥐며 낮게 말했다.
“저는 알죠.” 그가 작게 웃었다.
“그 책, 첫 문장이 아직도 기억나요. ‘말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때론 침묵보다 더 시끄럽다’, 그거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웃음부터 새어 나왔다. 잊고 있던 책의 제목이, 낯선 사람의 입을 빌려 돌아왔다. 그 말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조금 이상하면서도… 어쩐지 재밌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두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머뭇이다가 말했다.
“그냥 가볍게 읽으려 했는데, 생각보다 깊게 들어오더라고요.”
“어떻게 찾았어요? 그거, 제대로 출간된 책도 아니었는데.”
“이번 시나리오 보고… 혹시 다른 글도 있나 찾아봤어요. 그러다 우연히 그 제목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진짜 우연이었는데… 읽고 나서 며칠 동안 좀 이상했어요. 지금 대본이랑도 뭔가 비슷하고요. 꺼내지 않는 말들 사이에서, 마음이 자꾸 움직이는 거. 그런 게요.”
“그건 진짜 가볍게 쓴 글이었어요.”
숟가락 끝으로 밥알 하나를 살짝 옆으로 밀며 말했다.
“누가 볼 거라고 생각도 안 했고요. 그래서 조금 민망하네요.”
그는 앞에 놓인 국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김이 살짝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걸 불쑥 먹는 대신, 젓가락만 괜히 옆으로 옮겼다.
“전, 좋았어요. 지금 쓰시는 대본도 그렇고. 아마 작가님 글이 저랑 잘 맞는 걸지도 모르죠.”
나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 붙은 ‘한 달 두 번 휴무’ 종이 쪽으로 눈이 갔다. 글씨가 삐뚤고, 테이프는 한쪽이 말려 있었다. 바람이라기보단,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예전에 써둔 문장 하나가, 누군가 기억 속에 저런 종이처럼 붙어 있다는 게 좀 이상했다. 지워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짝이지도 않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기억해 줄 만큼의 글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그는 마지막 반찬까지 비우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려고 보니, 이미 계산대 앞엔 그가 서 있었다. 카드를 내미는 손목 너머로, 식당 아주머니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감사해요, 감독님-”
밖으로 나와 걸음을 맞췄다.
“다음엔, 작가님 좋아하는 메뉴로 먹어요.”
“그럼, 다음엔 제가 살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식당 앞, 햇빛이 간판을 타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바닥엔 누군가 흘린 단무지가 납작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화분 하나가 기울어진 채 벽에 기대 있었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긴 물은 반쯤 말라 있었고, 담배꽁초가 몇 개 떠 있었다.
“오늘 작가님과 시간 보내서 좋았어요. 얘기도 많이 나누고-”
“그러게요. 미팅이라기엔 좀, 수다였죠.”
“근데 그런 시간이 더 도움 되는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더 또렷해졌거든요.”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작게 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다음 미팅 있어서, 회사로 바로 가야 해요.”
“네. 조심히 가세요.”
그가 한 발 물러나며 손을 들어 보였다.
“또 봬요, 작가님.”
“네. 감독님-”
그가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투명 비닐봉지 같은 바람이 잠깐 맴돌았다. 나는 문득, 발끝에 떨어진 쌈지 담뱃갑을 피하듯 비켜 걸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화면 밝기가 낮아 잘 보이지 않았고, 나는 손등으로 햇빛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