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 이야기
열여섯.
학교가 끝난 오후였다. 방 안은 아직 덜 식은 햇빛으로 묵직했고, 선풍기 날개가 느리게 돌아가며 먼지를 흩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익숙한 발소리. 잠시 뒤, 현관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가 났고- 언제나처럼, 예고 없이 그녀가 내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가방끈은 한쪽 어깨에 겨우 걸려 있었고, 운동화는 제멋대로 벗겨졌다. 마치 자기 집처럼 익숙한 동선.
“이재하.”
그녀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잠깐, 문제집에 그어놓은 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데?”
“나 이번에는 진짜 연애하려나 봐.”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잘 들어봐. 이번엔 진짜야.”
그 사이,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한쪽에 놓인 물컵에 정수기 물을 천천히 따라내고, 묻지도 않고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여전히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을 쏟아냈다.
“작년에 같은 동아리였던 오빤데, 지금은 남영고 다니거든? 며칠 전에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때 인사하고 얘기하다가 전화번호도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오늘까지 삼일 연속 문자하고 전화하는 중이라니까!”
그녀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말보다 먼저 숨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물컵을 그녀 쪽으로 살짝 밀며 말했다.
“물 좀 마시고 말하던가.”
우리는 한 박자 늦게 나를 올려다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가, 곧 익숙한 듯 웃으며 물컵을 집어 들었다.
“아, 그러네. 나 진짜 숨도 안 쉬고 말했지?”
입을 대고,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 한 모금은 천천히, 또 한 모금은 단숨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에 똑, 하고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음…”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 안엔 딱히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았다.
“뭐… 그런 거 같긴 한데.”
“뭐야, 진짜 들은 거 맞아? 방금 말한 거 기억은 해?”
나는 웃지 않았다. 책상 위 굴러 있던 연필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손가락 마디에 연필심 가루가 옅게 묻었다.
“그래서 너는 삼일 만에 사랑에 빠진 거고?”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내 말에 수줍게 웃었다. 입술 끝이 조용히 올라가고, 시선은 바닥으로 잠깐 흘렀다. 말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그 표정.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렸지만, 그 웃음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녀는 가방을 툭,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성큼 선풍기 앞으로 다가갔다.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앉았다.
“좀 떨어져 앉아, 다친다. ”
“괜찮아.”
내 말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릎을 세운 채,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었고, 땀이 번진 피부 위로 선풍기 바람이 느릿하게 스쳤다.
“근데 이재하,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녀가 대쯤 내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좋아하는 사람. 어렸을 때, 봉선 누나를 보며 얼굴이 붉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게 진짜 ‘좋아하는 감정’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땐 그냥 그런 기분이었고, 얼굴이 빨개졌고,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자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저 그녀가 내 방 선풍기 앞에 앉아 있고, 가방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냉장고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둘 다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 모든 게 좋았다. 특별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보다, 그보다 훨씬 작고 흐릿한 무언가. 하지만 어쩌면 더 오래 남는 것. 그게 지금 내 마음의 모양이었다.
“너 좋다고 하는 여자도 없어?”
“저번에… 너네 반 이민주가 초콜릿 줬어.”
“엥? 우리 반 이민주?”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내게 몸을 바짝 기울여 왔다. 의자 다리 근처까지 미끄러진 무릎, 치마 끝이 가볍게 들렸다가 허벅지에 스치듯 내려앉았다. 학교 끝나고 바로 달려온 얼굴. 목덜미엔 땀이 조금 배어 있었고, 자주 쓰던 로션 냄새 사이로 미세하게 염분 섞인 공기가 지나갔다.
그 순간, 가슴이 툭, 튀듯 뛰었다. 붉어진 뺨, 땀에 들러붙은 앞머리, 내 다리 옆에 너무 가까이 와버린 작은 몸.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왜인지 모르게 숨이 가빠졌고, 뜨거운 공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녀는 가까웠고,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 땀이 배어든 로션 냄새, 미세하게 달라진 체온, 그날 입은 얇은 교복 치마의 바스락 거림까지-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민주가 초콜릿 주면서 뭐라 그랬는데? 말 좀 해봐.”
그녀가 웃으며 몸을 더 붙였다. 어깨가 살짝 닿았고, 무릎이 스치듯 붙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고, 목구멍까지 뭔가가 차올랐다.
“야, 야… 좀 떨어져 봐.”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밀었고, 등받이에 등을 붙인 채 숨을 고르려 했다. 머리가 뜨거웠다. 볼 안쪽까지 열기가 번졌고, 이마엔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마치 더위를 먹은 것처럼.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런 기분.
“치,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말도 안 해준 거야? 치사해, 이재하. 나는 너한테 뭐든 다 말하는데.”
그녀는 다시 선풍기 앞으로 돌아가 무릎을 세운 채 앉았다. 그래도 붉어진 나의 얼굴은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이미 달궈진 마음이 꺼질 줄을 모른다.
“흠, 흠.”
괜히 어색한 기침을 하며 몸을 앞으로 돌리려다가, 치마 밑으로 가늘게 뻗어있는 그녀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고, 가늘고, 기억보다 조금 더 낯설었다. 언제부터 저랬지. 저렇게 하얬었나. 저렇게 얇았었나. 가슴이 또 한 번, 울컥 뛰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모든 게 조금 이상했다.
심장이, 내 몸보다 먼저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