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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뺑그이 Apr 05. 2023

행구와 사직수영장 간 날


행구와 나는 목욕 바구니를 들고 111번 버스를 탔다. 버스엔 사람들이 많았고 만덕터널은 언제나처럼 밀렸다. 버스에 에어컨없던 시절이었다. 밀리는 터널 안에서는 후덥지근해도 창문도 못 열었다. 승객들은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끈적이는 육수를 쭉쭉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20분을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서 터널을 빠져나왔다. 창문을 열자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탄식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터널을 빠져나온 버스는 병목 구간인 미남로터리를 벗어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사직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내수영장으로 가는 사직야구장  광장엔 롤러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는 인파가 넘쳐났다. 나중에 들이닥칠 야구장 관람객 인파까지 더해지면 이곳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해진. 고무줄을 냉수에 넣고 국수라고 팔아도 팔릴 상권이다. 행구와 나는 인파 속을 비집으며 목욕 바구니를 들고 당당하게 걸었다.


우리가 왜 목욕 바구니를 들고 수영장으로 느냐. 이유는 엄마에게 목욕탕 요금 1500원을 받았는데 수영장 요금도 1500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목욕탕 냉탕에서 수영하면서 떠들면 동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조용하라고 호통을 쳤는데 그런 눈치를 안 보고 마음껏 수영을 할 수 있었 때문이. 또 수영하면서 간간히 몸을 문질러 주면 때도 벗기고 수영도 할 수 있다는 기적의 일석이조 논리로 우린 목욕 바구니를 들고 수영장을 간 거였다.


내가 더 어릴 적엔 엄마는 빨간 고무대야에 날 집어넣고 때를 벗기곤 했다.


"아프다 좀 살살 밀어라. 때를 벗기나 살을 벗기나 따가워 죽겠네!"


"아이고 까마귀가 행님아 하겠다. 아이고 때 봐라 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좀 있거라!"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빨간 고무대야에  가두고 수세미 고문을 했었다.


유치원 때까진 엄마와 여탕에 같이 갔고 1, 2학년 때에는 빨간 고무대야에서 목욕하거나 아빠를 따라갔다. 하지만 아빠는 늘 바빠서 자주 같이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3학년 때부터는 내가 징그러워졌는지  엄마가 목욕비를 줬다.  돈이 생겼는데 그것도 거금 1500원이 생겼는데 내가 순순히 목욕탕을 갈 놈이 아니었. 난 오락실에 가서 목욕비를 다 쓰거나 퐁퐁이라고 불리는 트램펄린에서 뛰어놀고 떡볶이, 달고나를 사 먹으면서 목욕비를 신나게 탕진했다. 그러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친구집에서 목욕 바구니와 머리에 물만 묻히고는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엄마는 웃통을 벗기고 때를 잘 밀었는지 검사했다.


"니 솔직히 말해라. 목욕탕 안 갔제? 이거 봐라 이거 때 밀리는 거 봐라. 니 목욕탕 안 갔제?"


"가긴 갔는데 때는 대충 밀고 냉탕에서 수영하고 놀았다."


"엄마가 몇 번을 말하드노. 갑갑해도 참고 뜨거운 물에 목까지 담그고 10분 이상 있으랬다이가 그래야 때가 잘 밀린다고 와 말을 안 듣노. 하이고 고마 목욕비 또 날렸네. 니 시꺼멓게 돌아다니면 사람들 다 엄마 욕한다 아나. 하이고 참말로 엄마가 사람들한테 욕먹으면 니는 좋나?"


엄마는 결국 때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부턴 목욕비를 주지 않는다는 엄포를 놓았다. 그 후부터는 목욕비를 다 탕진하고 친구집에 가서 때수건에 비누거품을 잔뜩 내서 몸을 박박 닦고는 때 검사를 받는 꼼수를 부렸다. 목욕비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달콤한 공돈이었기에 난 목욕비를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아무도 없는 토요일에 욕조에 물을 받고 때를 미리 박박 벗기고는 일요일에 대충 물만 묻히고 검사받으면 되겠단 계략꾸몄다. 그런데 엄마가 웃통을 벗겨보더니 '이번 주는 목욕탕 안 가되겠다.' 맙소사! 이런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엄마의 몸 검사와 때 검사는 날로 엄격해졌고 나의 꼼수와 요령도 날로 진화했다.


행구와 수영장에 들어서자 특유의 기분 좋은 소독약 냄새가 확 퍼졌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동굴 속처럼 웅웅거렸다. 우린 신난 마음에 얼른 수영장 탈의실로 갔다. 난 챙겨 온 수영모와 수영복 수경을 꺼내 얼른 갈아입으려 했다. 그런데 행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꾸 자기 목욕바구니를 뒤졌다.


"뭐하노 빨리 갈아입고 물에 들어 가자."


내가 재촉했다.


"아 분명 가지고 왔는데 수영복 안 입으면 못 들어 가나?"


행구가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인마. 수영복 안 가지고 왔나? 집에 갈 버스비 이백 원 빼면 십원도 없다. 수영복 대여할 돈도 없다. 다시 잘 찾아봐라."


"아이씨 없다니까."


"뭔데, 아 진짜 돌겠네."


그러더니 갑자기 행구가 바지를 휙 벗었다.


"미리 입고 왔지롱. 이래야 빨리 수영장 들어가지 바보야. 내 먼저 들어간다. 메롱!"


행구가 짐을 얼른 락카에 넣고는 수영장으로 먼저 달려갔다. 나는 또 당했지만 내심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얼른 뒤를 따랐다.


행구와 나는 개구리헤엄도 치고 개헤엄도 치고 물방개 수영도 했다. 수영 잘하는 형누나들이 접영, 배영을 하면 그걸 흉내내기도 다. 잠수해서 누가 오래 버티나 시합도 하고 방귀를 뀌고 올라오는 기포를 보면서 깔깔거렸다. 그러다가 엄마의 얼굴이 스치면 손으로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행구 니도 때 좀 밀어라. 엄마한테 안 들켜야 다음에 또 수영장 오지."


"나는 원래 때가 많이 없다. 더러운 놈아 니나 많이 밀어라. 으하하하."


50 수영을 하면 10분 휴식 시간이었다. 그 휴식 시간엔 애들은 출입이 금지된 선수용 수영장이 바로 옆에 있었고 아찔한 높이의 다이빙대도 있었다. 거기서 한 번씩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을 손뼉 치며 구경했다.


"니는 다이빙해서 바닥에 대가리 박아도 바닥이 깨지지 니 대가리는 멀쩡할걸 니는 돌대가리니까."


행구가 말했다.


"아가리 닥쳐라. 내가 돌이면 니는 쇠대가리다."


그렇게 우리는 3시간 넘게 수영하며 놀았다. 그러면서 점점 매점에 라면, 김밥,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집에 갈 차비 말고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본전을 뽑도록 더 놀고 싶었지만 배가 고파서 도저히 안 되겠다며 우린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 인파들로 지옥이 돼버린 사직야구장 광장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어? 어? 없다."


행구가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또 지랄을 했다.


"안 속는다. 장난치지 마라."


"진짜 없다. 니 호주머니에 있는지 한번 봐봐."


"야 인마. 저기 111번 온다. 장난치지 말라고 돈 꺼내라 버스 다 와 간다."


"진짜 없대도 뻥 아니고 진짜다."


난 그래도 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차했던 111번 버스는 그대로 가 버렸다.


"버스 갔잖아. 장난 그만 치라고."


"진짜래도!"


행구는 버스비 이백 원을 진짜 잃어버렸다.


수영도 했겠다 배는 고플 대로 고프고 버스비는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우린 너무 어렸던 걸까. 국민학교 4학 년이었던 우리는 사람들에게 버스비를 빌린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택시는 엄청 비싸다고 알고 있었고 택시를 타본 적이 거의 없어서 택시를 탄다는 개념 또한 없었다. 행여나 탔다간 엄마가 택시 요금도 요금이지만 목욕탕 안 가고 어디 갔었냐고 추궁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일요일마다 생기는 공돈이 사라질 판이었다. 우린 고심 끝에 지극히 원초적인 결정을 내렸다.


집까지 !


그렇게 우리는 태어나서 가장 멀리 걸어가야 할 집을 향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목욕 바구니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행구 목 안 마르나. 배고픈 건 배고픈 건데 목이 너무 마르다. 뒤지겠다."


"나도 목말라 뒤지겠다. 배도 고프고"


그러면서 걷고 있는데 슈퍼마켓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슈퍼마켓 앞에는 곧 다가올 추석 때문인지 선물세트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행구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것들을 보았다. 그러다 둘이 눈이 마주쳤다. 뭔가 눈빛에서 무언의 악한 공감대가 생성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우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담벼락 사이로 숨어들었다.


"행구 네가 보다 더 빠르니까 내가 가서 슈퍼 주인 안 보이면 신호할 테니까 졸라 뛰어와서 저거 델몬트 주스 들은 상자 들고 튀자. 목말라 뒤지겠다. 아직 집까지 졸라 멀다. 할래 말래?"


행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고민했다.


"와 졸라 떨리는데 걸리면 우짜지?"


"내가 지나다니는 사람들 없을 때 슈퍼 안에 보고 신호할게. 안전할 때 얼른 들고뛰면 안 잡힐 거 같은데? 아니면 그냥 걸어가고 나는 목말라서 못 걷겠다."


"알았다. 휴우...... 대신 신호 잘해라. 와 떨린다."


"알았다. 내가 먼저 가서 신호할게."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슈퍼 앞 쪽으로 갔다. 거리엔 인적도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슈퍼 앞쪽을 지나면서 슈퍼 안쪽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슈퍼 안에는 손님도 주인도 안 보였다. 난 행구에게 수신호를 보내고는 목욕 바구니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행구도 내 수신호를 보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목말라서 하나도 힘이 없었는데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듯 다리가 모터를 단 것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를 냈다. 난 달리면서 뒤돌아 행구를 보았다. 행구는 델몬트 주스 박스를 들고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뛰었다. 한참을 뛰다가 이 정도면 안정권이다 싶은 지점에서 좁은 골목으로 파고들었고 행구도 곧 나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헉헉... 허..억... 헉! 행...구.. 성공... 했나. 와 졸라 숨...허..어.. 차다. 빨리.. 마.. 시... 자!"


행구도 가뿐 숨을 몰아쉬며 누가 따라오지는 않는지 왔던 골목을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헉헉 거리며 델몬트 주스 상자를 열었다.


델몬트 주스 상자안에는 델몬트 주스는 없고 큰 보루코 벽돌이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벽돌을 보았다.


그리고 난관은 금방 또 생겼다. 바로 터널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덕터널은 1호 터널이 있고 2호 터널이 있었다. 1호 터널은 오래되어서 요금 톨게이트가 없었고 2호 터널은 요금 톨게이트가 있었다. 누나들이 톨게이트에 앉아서 차가 지나가면 요금을 받았다. 2호 터널은 가까운 거리지만 1호 터널은 산 위쪽으로 훨씬 더 걸어야 했다. 우린 고민에 빠졌다.


"행구야 근데 2호 터널로 가면 우리도 지나가는 거니까 자동차처럼 누나들이 통행료 내라고 하는 거 아니가?"


"그럴 수도 있지. 지나가면 일단 돈을 내야 하니까. 근데 1호 터널은 요금 안 내도 되잖아."


"근데 1호 터널은 저기 위까지 훨씬 많이 걸어야 된다. 졸라 멀다. 어떻게 할래?"


"아니 우리가 2호 터널로 갔다가 누나들이 통행료 내라고 했는데 내서 경찰이라도 부르면 우리가 붙잡혀 갈 거고 결국 엄마한테 말하면 우리 목욕탕 안 가고 수영장 간 거 들키는 거 아니가?"


"맞네! 목욕탕 안 간 거 들키면 다음 주에 엄마가 목욕비 안 줄 수도 있겠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우리 좀 멀어도 1호 터널로 가자. 안전하게."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게 맞는 거 같다."


우린 분란 없는 극적합의에 이르렀고 만덕 1호 터널을 향해 가파른 산길 도로를 또 걸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었고 입은 더 바짝바짝 말랐다.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터널 앞에 도착해서 우린 터널의 위용과 그 안에서 나는 엄청난 소음에 압도되었다. 천장에 큰 항공기 날개에 붙은 것처럼 생긴 엔진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서 엄청난 소음이 났다. 무슨 로켓이 발사되는 소리 같았다. 행구와 난 눈빛을 주고받고서로에게 힘을 얻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공기가 엄청 안 좋았다. 너무 시끄러워서 한 손으론 귀를 막고 한 손은 목욕 바구니를 들고 고개는 아래로 숙이고 걸었다. 눈도 코도 따가웠다. 걷고 있는데 행구가 뒤에서 툭툭 쳤다. 돌아보니 행구가 웃으면서 지나가는 버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난 지나간 버스를 보다가 다시 뒤에서 점점 다가오는 버스를 보았다. 기사와 승객들이 저것들은 대체 뭐지? 하는 표정으로 우릴 보며 지나쳐 갔다. 승용차들도 택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맹이 둘이서 목욕 가방을 들고 산속 터널을 걸어가고 있으니 충분히 신기했을 법도 했다.  같은 반 친구라도 날 혹시나 볼까 봐 쪽팔려서 고개를 더 숙이고 걸었다. 행구와 간간히 말을 주고받기를 시도했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고 공기가 너무 안 좋아서 더 이상 입을 열기도 힘들었다. 저 멀리 터널 끝이 광명의 빛처럼 보였다. 어떤 종교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장면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터널을 겨우 빠져나오니 어느덧 컴컴한 밤이었다. 우린 터널이 너무 무서워서였던지 나오자마자 실성한 사람들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마도 험난한 길을 해치고 살아남은 안도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와아 이제 집 다 와 간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사직에서 만덕까지 걸어온 게 그래도 걸으니 결국 와지긴 와지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


내가 말했다.


"진짜 이거는 평생 기억나겠다. 으하하하"


우린 동네가 평소보다 좀 작아보이지 않냐고 하면서 마저 걸었다.


행구 집 앞에서 우린 손을 흔들고 헤어졌고 조금 더 걸어드디어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엄마의 잔소리 폭격은 시작되었다.


"니! 해 떨어진 지가 언젠데 이제 오노!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가만... 보자... 아이고... 야가......  야가... 왜 이렇노? 목욕탕 보내놓았더니만 무슨 까마귀가 돼서 왔노! 니 목욕 바구니는 들고 어디서 뒹굴다가 왔노. 하이고 이게 다 뭐고?"


난 말할 힘도 없었다.


"엄마... 물... 내 물 좀 도..."


"하이고 들어 온나. 들어 온나. 니 어데 깡패한테 잡혀 갔디나? 어? 말해 봐라. 꼴이 이게 뭐고?"


"물 달라고 물... 내 목마르다."


엄마는 놀란 눈으로 냉장고에 오찬물을 가지러 갔고 난 거실에 달린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보자 터널에서 벽에 슥슥 스쳤던 장면들과 얼굴을 만졌던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울 속에는 정말 검은 까마귀 같은 놈 한 마리가 퀭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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