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둘러싼 다양한 마음들은 시간 차이를 두고 각자에게 피어나고, 도착
편지를 둘러싼 마음
편지에는 시차가 있다.
편지를 적는 마음과 읽는 마음.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과 종이에 우편을 붙이는 마음. 갑작스레 편지를 받는 마음과 답을 기다리는 마음. 쉽게 버려지지 못한 편지와 편지를 봉하는 마음. 편지를 둘러싼 다양한 마음들은 시간 차이를 두고 각자에게 피어나고, 도착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현대의 시스템과는 상충된 느리고 띄엄띄엄 떨어진 소통.
흔하지 않지만 간혹 내가 전해준 편지를 다시 읽게 되는 순간도 있다. 날것의 마음을 드러냈던 글을 읽다보면 부끄럽다. 흑역사를 고이 접어 상태에게 건네준 기분이랄까. 종이에 펜을 꾹꾹 눌러 의미를 새기던 그 날의 나는 분명 진심이었는데. 너무 솔직하게 적어낸 진심이 괜히 민망하고, 때로는 그 날과 달라진 나의 마음을 바라보며 놀란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한 적도 있었다. 어제 그 말은 쓰지 말걸. 새벽 감성에 취해 횡성수설했던 것이 떠올라 편지를 보내기 직전 한참을 서서 고민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편지를 떠올리며 이불을 차고, 머리를 뜯었던 밤도 있었다.
쓰는 시간의 마음과 보내는 시간의 마음. 그리고 그 편지가 또 다른 마음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마음.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조금 다른 마음이 되었어도, 우리는 그 순간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부끄러운 편지를 건넨다.
반대로 그렇게 내 책상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보며 잠을 설쳤던 수많은 시간들도 있었다. 사랑과 고마움과 미안함과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미처 하지 못한 말들. 그 마음이 소중해서 버리지 못한 편지가 아직 내 방에는 한가득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 오래 마음을 나눈 친구가 주었던 편지부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의 문장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방 구조를 바꾸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나지만 편지상자만큼은 비우지 않고 오래오래 가지고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포착해서 기록해두는 일 같다. 작은 마음이 담긴 시간들. 비록 그 사람은 편지의 내용을 잊었더라도, 지금은 조금 마음이 되었더라도, 나에게 도착한 그 짧은 순간의 진심을 생각하면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되뇌이게 된다.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소중한 마음들을 고이 담아 서로에게 쥐어주는 것 그 자체로 편지는 참 소중하다.
요즘 손편지를 쓰는 일은 참 드문 것 같다. SNS나 전화로 쉽게 안부를 전할 수 있고 축하할 일이나 고마운 일이 생기면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기프티콘 하나가 더 쉽게 마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은 세상에 편지를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다른 세계의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가 그 편지를 받게 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 역시 웃음을 감추지 못 한다.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손편지에 괜히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종이와 펜을 준비해 종이에 직접 글을 적어나가는 수고를 감수하는 이유는 못 다한 말과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김민채 저자의 <편지할게요> 역시 편지를 둘러싼 마음과 자신만의 답장을 적어내려간 책이다. 서투르고 조심스러웠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주었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 섞인 기록들이 있다.
감성을 자극하는 특유의 문체와 형식이 어우러진 책으로, 너무 가볍지도 부담스럽지도 않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자그마한 위로를 건넨다. ‘여덟 살 때 친구에게 받은 첫 편지부터 어제까지 받은 편지까지 단 한 통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맥시멀리스트’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저자의 편지에 대한 사람은 각별해보인다. 눌러쓴 마음들이 모여 어떤 삶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삶의 이야기들이 있었길래 저자는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떠오른다. 저자의 표현처럼 ‘편지라서 외면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나를 무너져내리게 만들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수많은 관계과 시간들을 일구어왔다. 나는 어떤 마음을 나누며 살아왔던가. 동시에 아직 전하지 못한 미완의 마음들도 함께 떠오른다. 보고싶은 얼굴과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오른다. 방 한켠에 쌓여있는 편지지와 편지들을 생각하며 책장을 덮는다.
2017년 1월 2일,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A가 X에게』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렇듯 편지에는 여러 ‘나’와 ‘너’가 존재한다. 너를 알고 싶어 하는 내가 너에게 묻고, 네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너에게 나를 전하던 시간. 그래서 작가는 문득 멀리 가버린 이에게 묻는다. 편지를 띄운다. 오늘 너는 안녕하냐고, 나는 괜찮다고 안부를 전한다. 그러니 우리, 편지를 적어보자. 누구라도 그러하듯이.(출판사 서평 중 일부)
도서정보
낯선 이름에게 전하는
나의 은밀하고 소란한 편지
편지할게요. 모든 안부를 SNS로 나누고, 전화 통화조차 꺼리는 지금 편지라니. 여기, 늘 편지와 동행해온 사람이 있다. 빛나던 눈동자, 긴 시간 나눴던 대화, 그때의 목소리, ‘그’의 생각들…… 선물, 편지, 사진은 물론 작은 쪽지와 메모까지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 그것들을 버리면 한 시절이 영원히 소각되는 게 아닐까 불안한 사람. 그 불안함을 자양분 삼아 여전히 편지를 쓰는 사람.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며, 책방 ‘취미는 독서’를 운영하는 작가는 가까운 이에게 늘 이렇게 전한다. 편지할게요.
편지에는 여러 ‘나’와 ‘너’가 존재한다. 너를 알고 싶어 하는 내가 너에게 묻고, 네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너에게 나를 전하던 시간의 모음. 작가는 문득 멀리 가버린 이에게 묻는다. 편지를 띄운다. 멀든 가깝든, 성글든 빽빽하든 제자리를 지켜준 소중한 친구에게, 헤어짐을 아파하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도시에서 달려와 편지를 남겨준 연인에게,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난 선배에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달은 엄마에게. 오늘 당신은 안녕하냐고, 나는 괜찮다고 안부를 전한다. 오랫동안 나를 각별히 지켜준 ‘그들’을 위하는 마음, 『편지할게요』는 그들을 향한 속 깊은 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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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민채
발행일: 2021년 11월 5일
정가: 15,000원
출판사: 그책
ISBN: 979-11-88285-98-3 03810
아트인사이트 전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search.php?q=김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