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밤, 콘텐츠
콘텐츠를 전공하는 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이, 핸드폰 플레이리스트 목록이, 계속 돌려보는 영화 목록이 그 사람을 설명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좋아지면 그 사람의 재생목록을 훔쳐보고 싶어 집니다.
콘텐츠는 ‘언어‘입니다. 솔직하되 노골적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합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게임을 제작합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과정은 하나의 보물 찾기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자는 결국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메카닉과 은유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해석하거나 창조적으로 오독하며, 때로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감동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데 매개가 되는 모든 것을 콘텐츠 혹은 예술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모두에게 평생에 걸쳐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그 작품의 제목도 플롯도 알지 못하지만 저에게도 역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용기 내어 풀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문화예술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님의 말을 빌리자면, ‘불가피’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호모 나렌스(이야기하는 인간)인 우리에게 이야기의 욕망, 문화예술에 대한 욕망은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수단이자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건 결국 살아간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과정을 공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함께 살아가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가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더 많은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문화예술(콘텐츠)을 계속 공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우리의 표정"이라는 매거진으로 소개할 작품(콘텐츠)의 일부를 미리 소개합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산문)
조금 더 읽다 보면 당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날도 올까요? 가능만 하다면 모든 문장을 외워버리고 싶은 책입니다. 읽다 보면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고 싶어 집니다. 그의 말처럼 분명 실패하겠지만,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웨스 앤더슨(영화)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 이동진. 말을 덧붙이기 조심스러울 만큼 정확한 문장입니다. 감각적인 연출과 디자인으로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웨스 앤더슨입니다. 그 시대에 실제 사용하던 화면비로 화면을 구성하는 형식미와 회화적인 화면 구성, 감각적인 연출이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덕분에 콘텐츠를 바라보는 미학적인 기준이 하나 생겼습니다.
#<카우보이 비밥> - 와타나베 신이치로(애니메이션)
지금은 다시 모이지 못할 S급 인력들이 신예이던 때에 일본 버블경제를 만나 만들어진 작품으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작화와 수준 높은 음악을 자랑합니다. 음악이 단순히 화면을 보조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주제의식과 결부되어 사용됩니다. 콘텐츠와 음악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 작품입니다.
#<Paris in the rain> - Lauv (음악)
힘든 날이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곡입니다. 이 곡만 들으면 정말 비 오는 파리 한가운데 있는 기분입니다. 몽환적인 사운드와 속삭이는 듯한 가사, 감각적인 리듬이 가만한 날들을 위로합니다.
#<날개> - 이상(소설)
재미도 없는 말장난이지만, 이상의 소설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습니다. 소설은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특정 환경에 던져져 어떤 사건을 만나며 산출되는 진실에 응답하는 장르인데, 날개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진실은 독특한 울림이 있습니다.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되뇌이는 독백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겨드랑이가 간지럽습니다.
#<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소설)
"그에게선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첫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입니다. "편지를 거기 둔 건 나 읽으라는 친절인가?" 하는 문장은 여러 패러디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비누 냄새가 나는 현규에게 까닭도 없이 잔인해지는 숙희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괜스레 마음이 간지럽습니다. 오늘은 샴푸가 아니라 비누로 머리를 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