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선의의 ‘바게트 빌런’이 작정하고 펼치는
다채롭고 맛깔나는 바게트 세상
요리 잡지 기자 출신의 정연주 작가는 현재 프리랜서 푸드 에디터이자 요리책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음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저자가 그간 수없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것 중에서 택한 단 하나, 바게트를 향한 사랑 고백을 펼친다. 1일 1바게트로도 모자라 직접 발효종을 키워 매주 바게트를 굽고 급기야 빵을 먹기 위해 근육까지 준비하는, 한마디로 선의의 ‘바게트 빌런’이 작정하고 보여주는 바게트의 맛과 멋을 책 한 권에 밀도 있게 담았다.
나는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을 질투한다. ‘덕질’이라고 불리는 영역들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좋아진 무언가 때문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 사람들. 단순히 좋아하는 영역을 넘어서 전공도 아닌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전에 계획 없던 여행을 떠나고 운동을 하고 빵 반죽을 만들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좋아하는 마음은 삶을 바꾼다.
나도 요즘 구움과자를 만들고 빵을 굽는 재밌는 삶을 살고 있는데, 학원에서 한창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자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다닐 때 공부하고 전공했던 일로 10년 먹고살고, 일하면서도 놓치 않고 즐기던 취미로 그 이후를 먹고산다더라고. 그러니까 지금 재밌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보라고.
그러더니 최근에 찍었다는 바디프로필을 보여줬다. 본인은 빵이 좋아서 운동하고, 술이 좋아서 운동한다면서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건 결국 운동으로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먹고싶은게 많은데 살이 쪄서, 빵을 반죽하는데 힘이 모자라서, 오래오래 즐기기 위해 체력이 필요해서 같은 이유들로. 오늘의 책 제목도 그래서 절묘하다.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덕후는 죽을 수 없다. 오늘도 좋아하는 바게트를 먹어야 하고 맛있는 바게트를 반죽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해야 하니까.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결국 내 삶을 돌보는 방향으로 향하고, 힘을 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다.
이 책의 저자 정연주는 사법시험 준비 중 진정 원하는 일은 ‘요리하는 작가’임을 깨닫고 진로를 바꾸었을 만큼 좋아하는 일에 진심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자세히 귀 기울이고 마음을 쏟을 줄 아는 진심은 바게트 앞에서도 빛을 발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바게트가 지닌 “연한 모래색에서 황갈색, 짙은 갈색으로 변화하는 그라데이션”만큼이나 다채로운 바게트 세상이 펼쳐진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새삼스럽게 사랑에 빠진 바게트에 대한 예찬을 시작으로 바게트를 향한 ‘찐’ 사랑을 보여준다. 틈만 나면 바게트 맛집을 검색해 지도 앱에 색색깔의 별로 저장해두고서 약속만 생겼다 하면 근처 맛집을 순회하는 것은 일상다반사. 오로지 맛있는 바게트를 먹겠다고 악명 높은 배차 간격의 경의중앙선을 견디고 길바닥에 시간을 버리면서 몇 개의 구를 지나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급기야 바게트의 파삭파삭한 겉껍질과 쫄깃한 속살을 원할 때마다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형태로 커스텀”하기 위해 직접 반죽하고 굽는 경지에 이른다. 모양도 맛도 식감도 만족스러운 바게트를 만들고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매일 반죽을 시도하고 레시피를 연구한다.
맛있는 바게트를 사수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제든 바게트를 더 맛있고 즐겁게 먹기 위해 각종 치즈와 잼, 버터, 햄, 허브 등 “‘빵님’만 들어오시면 완성되는 빵태계 사무실”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요, 최상의 온도와 최적의 환경에서 바게트를 굽기 위해 맥반석을 사고, 반죽을 들고 출퇴근하는 수고로움도 기꺼이 감내한다. 하다 하다 이제는 캠핑장에서 장작불로 바게트 굽기에 도전 중이다.
이렇듯 자신이 바라는 바게트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바게트와 함께하는 ‘바게트 생활자’의 기상천외하고 사랑스러운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가득하다.
그런데 파리에서 먹는 시간을 순전히 만끽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 한 점 없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음식으로 새삼스럽게 눈이 번쩍 뜨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애정이 충만하다고 자부했으니까! 하지만 진부하게도 사랑이란 일절 계획도 없던 순간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존재였다. 그렇다. 놀랍게도 파리에서 느닷없이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바삭하고 고소하고 쫀득하고 말랑하고 향긋하고 예쁘고, 아무튼 좋은 건 혼자 다 하는 바게트에.
11-12쪽 <아무튼 좋은 건 혼자 다 하는> 중에서
그러니까 결론은, 할머니가 되어도 바게트를 반죽할 체력이 있고 구운 빵을 끼니마다 먹을 수 있으려면 다치지 말고 꾸준히 운동해야겠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다. 바닥에 눕는 것만이 방전된 체력을 충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시절로 돌아가지 말자. 그리고 후천적으로 획득한 빵 만드는 근육, 소중한 빵근을 잃지 말아야지.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67쪽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중에서
바게트는 언뜻 담백함이 매력인 듯하지만 사실 단순한 풍미의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느껴지는 빵이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면서 기공이 큼직해 손으로 뜯으며 누르면 순식간에 납작해지는 속살과, 바삭바삭하지만 딱딱하거나 단단하지 않아 부스러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껍질 질감의 조화. 벌어진 칼집과 뾰족한 끄트머리까지 연한 모래색에서 황갈색, 짙은 갈색으로 변화하는 그라데이션만큼이나 옅고 짙은 고소함을 느끼게 하는 껍질의 풍성한 향기. 단순한 빵에서 느낄 수 있는 풍미만 놓고 본다면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맛을 전부 보여준다.
151-152쪽 <단순함의 미학, 잠봉뵈르> 중에서
아트인사이트 전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search.php?q=김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