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천선란, 윤혜은, 윤소진.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내일은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솔한 다짐, 매일 한두 개의 후회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향한 다정다감 위로의 대화들.
약함이 모여 강해지는 순간
내 일기장에는 <솔직해지는 연습>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다른 곳에 쉽게 담아내지 못할 말들을 정리해서 풀어놓고, 안개처럼 흐릿한 마음들을 붙잡아 이름을 붙여주곤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새하얀 종이 혹은 화면 위에서 나는 솔직해진다. 마음껏 자책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내 일기장을 손에 넣고 온세상에 공개해버린다고 협박하면 나는 순순히 그 사람의 요구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 가장 내밀한 서사와 날것의 감정이 펄떡거리고 있는 문장들은 내가 가장 약한 부분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들키면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문장과 이야기들이 내 일기장 안에는 가득하다. 가장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담기는 공간. 과장된 희망과 과장된 우울이 공존하는 공간. 일기장이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
여기에도 일기를 쓰는 세 사람이 있다. 오늘 책의 주인공인 천선란, 윤혜은, 윤소진은 글 쓰는 세 여자의 일상 팟캐스트 <일기떨기>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 <일기떨기>는 ‘일기 쓰기’와 ‘수다 떨기’가 만나 탄생한 오디오 방송으로 편집자 윤소진, 소설가 천선란, 그리고 에세이스트이자 서점인 윤혜은이 함께 진행한다. 매회 각자 쓴 일기, 청취자의 일기로부터 대화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들에게 일기를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나아가 일기를 함께 읽고 나눈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궁금함에 책장을 넘겼다. 나에게 일기란 너무 취약한 공간이니까, 그걸 나누는 모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고.
프롤로그에서 이들은 일기를 쓰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이 삶을 협업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일기를 통해 함께 살아가고 함께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너그러운 청취자들이 우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예능으로, 때로는 교양으로 취급해주는 덕분에 2년째 마음껏 까불고 있을 뿐이다(그리고 청취자들의 일기를 끌어들임으로써 공범으로 만든다). 겨우 말을 나누는 것뿐이래도, 이 삶을 협업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사실 누가 내 일상에 침투해 말씩이나 더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p.16
<일기떨기>를 방송하면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막연히 동의했던 시절과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의 어떤 부분은 영영 변하지 않겠지, 변하려 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고집스러운 테두리 바깥에서 <일기떨기>의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한, 나는 기꺼운 균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음의 일기를 쓰고 있을 것 같다. p.16
세 사람에게 있어 일기를 나누는 일은 “기꺼운 균열”을 기다리고 만나는 일인 듯하다.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던 일기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 말을 더하고 마음을 더하는 동안 나의 세계에는 금이 가고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뜻일까. 혼자 쓰는 일기는 확증편향과 자기확신으로 나를 내 안으로만 가둬두는 울타리가 되기 쉬운데,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교환하고 나의 일기를 재해석하는 묘미도 있는 듯하다.
일기에 대한 대화를 옮겨놓은 문장들을 읽다보면 뭐랄까, 참 좋다.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호기심에서 비롯한 관심과 질문이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주고, 어떨 때는 서로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체감하는 듯한 말로, 어떨 때는 비슷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와 순수한 감탄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혼자 쓴 일기는 배 밖으로 꺼내놓은 약점일지 몰라도 그걸 나누고 함께 읽어나가는 동안 일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재해석된다. 일기와 수다가 합쳐졌다는 이 모임을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확장되고 깊어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보고 싶다.
너무 우리끼리만 떠들었나, 뒤늦은 걱정이 무색하게 셋의 목소리가 섞일수록 우리의 이야기는 제법 들어줄 만한 것이 된다.
각자가 어떤 일기를 가져온대도 ‘혼자라면 할 수 없을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서로 덕분이다. 혼자 쓰는 일기가 나로 시작해 나를 거쳐 나로 끝난다면, <일기떨기>에서 같이 읽는 일기는 출발은 같아도 최소 두 갈래의 타인을 거친 나를 만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일기가, 함께 쓴 일기가 된다. p.15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져있고(1부: 이번 생엔 이렇게 살 수밖에, 2부: 기대 않던 마음에도, 3부: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방법), 각각 3명의 일기와 일기를 기반으로 한 대화를 담은 일기떨기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일기라고는 하지만 짧은 에세이에 가까울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나고, 일기떨기의 대화도 적절한 문체로 대화의 맛을 살려두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1부에는 누구 하나 좋다는 사람 없이 후회막심인 이십 대를 뒤로하고 이젠 “지나치게 하나의 나에게 집중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무장한, 막 삼십 대에 접어든 세 사람의 인생관이, 2부에는 결혼에 관심 없는 세 사람의 결혼식 로망이라거나, 만남과 이별, 모녀의 이야기 등 관계에 관한 꾸밈없는 고백이 녹아 있다.
3부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소설가, 음악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없는 에세이스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시작하기에 망설임 없는 편집자가 밝힌 지금의 삶을 더 세세히, 가치 있게 돌보는 방법이 담겼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일기를 함께 나누고싶다는 천선란 소설가의 말에 기대어 나도 내 일기장을 들고 슬그머니 세 사람의 옆자리에 앉아보고 싶다. 한 겹은 쉽게 바스라지지만 여러겹은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일기에서 꺼내놓는 순간들은 우리의 가장 솔직하고 예민하고 약한 부분이겠지만, 그 약함들이 모여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 팟캐스트 <일기떨기>를 진행하는 지난 2년 동안 자리 잡은 생소한 꿈이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때도 좁은 녹음실에 서로 부대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점점 실체가 또렷해지는 청취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허튼 말을 오래도록 나누고 싶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대화를,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하루의 기록을 오래도록 나누고 싶다. 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