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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뽁이 May 29. 2024

5. 착한 딸 파업 (2)

착한 딸 파업 11편

내 안의 착한 아이

 왜 나는 나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눈치 보며 칭찬받을 일에 몰두하는 착한 딸이 되었을까. 앞서 밝혔지만, 그건 바로 어릴 적의 내가 원인이었다.


 부모님께서 분가하시기 전까지는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그때부터 은연중에 시집살이하는 엄마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때 나는 명절 때마다 엄마를 돕는 착한 딸이 되었다.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질렸지만, 애써 웃으며 맡은 일을 해냈다.


 일찍이 어머니가 아프시고 수술을 받으셨다. 당시 통원 치료를 받으며 재활을 하셨는데, 내가 집에서 간병인 노릇을 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엄마를 씻겨주고 재활 겸 같이 산책을 다녀와야 했다. 사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책을 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착한 딸이 되어야만 하는 환경이었고 내가 그래야만 우리 가족이 버틸 수 있을 거란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도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흥미가 있었던 예체능 계통의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돈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금액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었다. 환경 때문에 꿈, 하고 싶은 말, 쉬는 것, 나를 위해 돈 쓰기 등 포기하는 것이 많아졌고, 그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었다.


 나는 언제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지만, 나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다. 가족 안에서 만들어진 이 기이한 상태가 내 안의 착한 아이를 압박했다. 언제나 착하게 커야 한다고, 부모님을 거스르면 안 된다고, 너보다 가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너 자신에게 돈 쓰는 건 아까운 짓이라고.


 그러다 보니 친구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나는 친구들에게 착한 친구였지만, 은근히 나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베푸는 호의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내게 거친 말을 휘두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입을 꾹 닫고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나보다 친구의 감정이 소중했기에.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업무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힘들면서 자꾸 남들의 힘듦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니까. 다만, 나는 그 시선을 남에게만 향했다. 나의 힘듦을 알아주고 아픔을 달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내 일도 하면서 남의 일도 함께 고민하느라 쉽게 소진되고 직장에 다니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내 안의 착한 아이는 착한 가면을 썼지만, 가면 아래 얼굴은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고 있었다. 그걸 참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참 미안했다. 늦게라도 나를 사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좋은 친구 되어주기

 가족과 남들에게는 관용적인 친구가 되어주던 나. 우울증을 앓은 후로는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자고 결심했다. 그 첫 단추가 심리상담 과제였다. 호텔에서 하루 자고 왔던 그 경험. 오롯이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법에 관해 참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여기에 내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방법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 직장에서 내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최근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직장에서는 초반부터 근무대장을 쓰는 것과 관련해 소소한 갈등이 있었다. 아무래도 시급으로 계산되는 월급을 받다 보니 평소에는 칼퇴근을 했지만, 직장 특성상 가끔 외부 행사로 초과 근무, 주말 근무가 발생했다. 그때 근무대장에 초과나 주말 근무를 쓰지 않고 유연하게 시간을 유용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기록이 없음으로써 발생하는 혹시 모를 불이익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게 조언한 팀원이 아니라 더 위의 직급인 팀장님과 논의하여 근무대장은 있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내게 조언을 한 팀원은 딱히 내게 불이익을 끼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 팀원과도 원활한 관계를 맺고자 하고 있다. 내 의견을 분명히 전달한다고 해서 꼭 미움받거나 크게 갈등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때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설령 남이 나를 책망한다고 해도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한 행동을 취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갖기로 했다. 특히 이번 일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나의 당연한 권리니까 물러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꾸준히 식단 관리하기. PT를 계기로 시작했던 식단 관리를 계속 이어 나가기로 했다. 혼자살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식비를 줄이려는 현실적인 이유도 크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내가 먹을 건강한 음식을 직접 준비하는 일이 나를 돌본다는 감각이 가장 큰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혹은 앱으로 필요한 식재료를 산다. 그리고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요리하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달까. 그동안 타인을 위해서만 정성을 다했는데, 이제는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세 번째,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 운동도 PT의 연장선이다. 운동을 하며 실제 감량 효과도 보았지만, 그보다는 생활에 활기가 생겨서 계속하고 있다. 다이어트 목적으로 시작해서 체중 감량을 했지만, 추진력이 붙은 김에 감량 목표를 더 높이고 운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새로운 직장에 입사한 이후로 은근히 피로함이 있어서 이전만큼 열심히 운동하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해야겠다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운동에 몰두할 때만큼은 직장에서나 가족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우울증에 운동이 좋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마지막은 너무 힘들 때 나에게 쉼을 선물하기. 앞선 운동과는 다소 상반되는 이야기 같지만, 열심히 사는 나에게 쉼은 꼭 필요하다. 적절한 쉼이란 퇴근하고 몸이 무거우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가볍게 쪽잠을 잔다거나 하겠다고 계획한 일을 100% 끝내지 못했어도 만족하는 것 따위다. 나는 늘 해야 할 일을 내 에너지에 대비해 과도하게 계획하는 편이라서 과업을 전부 해내지 못했어도 만족하기로 했다. 아니, 만족하는 데 익숙해지기로 했다. 늘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깎아내리던 지난날이 나를 죽고 싶다는 충동으로 밀어 넣었으니, 나를 살 만한 인생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은 만족하고 나를 칭찬하는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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