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10편
내 마음을 지키는 심리적 독립
그날은 PT 수업을 받고 집에 왔었다. 눈으로 봐도 제법 살이 빠져 있어서 보람을 느낀 날이었다. 부모님은 아마 나를 칭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외출 후 바로 PT를 받으러 가느라 검은 스타킹에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아빠가 먼저 남자를 꼬시려면 구멍이 숭숭 뚫린 망사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엄마도 깔깔대며 맞장구를 쳤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했다. 예뻐지고 싶어서 살을 뺀 것도 맞지만, 내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운동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은근히 연애 하라는 압박을 넣는 부모님이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내 다이어트가 무의미해지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꼬신다는 표현도 불쾌했고.
혹자는 한국의 부모들은 모두 칭찬하는 방식이 으레 그렇다고 반기를 들지도 모르겠다.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 한창 예민했고 엄마에게는 당분간 연애를 쉬고 싶다는 의사도 누누이 밝혔던 시기였다. 그래서 내 외모의 발전을 연애와 연결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고 싫었다.
나는 곧장 남자 만나려고 운동한 것 아니고 결혼할 생각도 딱히 없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지만, 엄마는 내가 비혼주의를 선언한 것처럼 놀라셨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불쾌한 티를 낸 것이 죄송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기에 내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연습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의 분위기가 서먹한 채로 밤이 깊어졌다. 나는 고민하며 뒤척이다가 다음 날 아침에 엄마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갑자기 결혼하기 싫다고 해서 놀라셨을 것 같다고.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지금은 마음이 힘든 상태이니 여유가 있을 때 연애와 결혼을 고려하고 싶다고 내 의견을 정리해서 보냈다. 엄마는 카톡을 보시곤 내 뜻을 잘 알았다고 하시며 이모티콘을 보내셨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후에도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마트에 다녀온 날, 엄마는 자취를 계획하는 나를 두고 철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가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 자존감이 낮아진 거야’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엄마가 그랬느냐고 하면서 민망한 웃음을 흘리셨다. 엄마의 말이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자 묘하게 속이 시원했다.
이런 식으로 부모님과의 대화 양식을 점차 바꿔가며 깨달았다. 상대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상대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의견을 명확히 표현하게 되면서 부모님은 나를 더 조심스럽게 대해주셨다. 그래서 부모님도 나를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체로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하셨다.
한 번은 엄마가 ‘딸이 눈치 본다고 말해서 내가 딸 눈치를 보게 생겼네’라고 하시기에 ‘엄마는 눈치 좀 봐줬으면 좋겠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반은 진심, 반은 농담이었다. 엄마가 나를 대할 때 말투에 조심성이 있었으면 하고 예전부터 바랐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이때 화내지 않고 깔깔 웃으며 좋아하셨다. 늘 수긍하기만 하던 딸이 반대 의견도 내며 능청스럽게 대처하니 기특하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어색하고 서툴지만, 내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름의 해결 방식을 찾았다. 덕분에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표현하며 다양한 표현 방식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를 우선시하는 대화를 반복하며 무겁고 답답했던 마음이 점차 가벼워지고 건강해짐을 실감했다. 심리적 독립이란 이렇게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닐까.
착한 딸 파업
우울증으로 심리상담을 받은 이후,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 무조건 ‘네’라고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즉 더 이상 고분고분한 딸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무조건 맞서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호구처럼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착한 딸이 아니라, 명확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독립적인 개체가 되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렇게 결심하고도 부모님은 여전히 내게 은근히 연애하라며 원치 않는 소개팅 자리를 주선해주시기도 한다. 본가에 갔을 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내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도 하신다. 그러나 전만큼 스트레스받지는 않는다. 잠깐 불쾌해졌다가도 내 선에서 조절할 수 있는 스트레스라면 최대한 조절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30여 년 동안 순종적이었던 딸이 갑자기 변했다고 해서 부모님도 쉽게 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변화가 부모님께는 낯설 것이다. 게다가 나조차도 가끔은 내 생각이나 의견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서른이 넘도록 YES맨으로 살았으니 어찌 보면 나도 나를 만들어나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변하기로 했다. ‘착한 딸’을 그만두고 오롯이 나로서 서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부모님도 나에게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착한 딸’ 대신 ‘나’라는 고유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나를 지킬 줄 아는 존재가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