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8편
설레는 과제
가족들에게 비밀이 없어진 덕분에 심리상담을 더 적극적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심리상담 선생님께 과제를 하나 받았었다. 이 과제를 위한 가족들의 협조도 수월히 얻을 수 있었다.
심리상담 과제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 하나를 해보기’. 너무 거창한 것 말고 일주일 후 심리상담 시간 전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왠지 사치 같아서, 시간이 없어서, 온갖 이유를 대며 머릿속에서 밀어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원데이 클래스, 해외여행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왠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원데이 클래스는 무료로 즐겨본 적이 있었고 해외여행은 계획형인 내가 무턱대고 추진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너무 부러웠던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지인은 내가 속한 작가 모임에 계신 분인데,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썼다고 하셨다. 노트북 하나 들고 훌쩍 호텔로 가서 글에만 몰두하는 시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젠가 나도 꼭 해야지, 라고 생각만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이거다!’ 생각이 들어 집에서 가깝고 별로 비싸지 않은 적당한 호텔에 1박 투숙을 예약해버렸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심리상담 과제로 호텔에서 1박 하기를 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때 지난 편에서 말한 아빠에게 서운했던 일이 생겼다. 호텔은 우리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노트북과 캐리어를 가져가기에는 좀 불편했다. 교통편이 나빠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운전면허가 없었기에 호텔에 체크인하는 날, 시간이 되면 아빠에게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일요일이라서 아빠는 알겠다고 답해놓고는 ‘교회에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이라는 꼬리를 붙였다. 나는 갑자기 그 말에 서운해져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장문의 메시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늘 가족들이 우선이었는데, 반대로 가족들은 나보다 우선하는 것이 많은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차라리 아빠에게 부탁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그날 혼자서 택시 타고 갈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나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그 순간에도 아빠가 내 말을 듣고 느낄 슬픔이 예상되어 죄책감을 느꼈다. 물론 직후에 아빠가 내 방에 오셔서 토닥여주신 덕분에 마음이 풀렸지만.
그때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만큼 참 어리광쟁이였던 것 같다. 마음이 약해져 있으니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고 한없이 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원하지 않을 때 감정의 소용돌이로 휘말린다. 이럴 때는 빠져나오기가 참 힘들다. 무겁고 끈끈한 감정이 내 다리를 붙잡고 수렁으로 당기고 있어서. 물론 아빠가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더 서운한 점도 있었다. 내가 반대 입장이었다면 만사 제치고 우울증에 걸린 가족을 위했을 것 같아서.
어쨌든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약속대로 나를 호텔까지 바래다주셨다. 심지어 아빠와 엄마가 각각 10만 원씩 용돈을 주셨다. 예전 같으면 거절했을 텐데, 이번에는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애쓰느라 지친 자신에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나를 데려다주고 떠난 후, 호텔 방에 나 혼자 남겨진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건 연인이나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설렘이었다. 그 방에는 나와 자유, 고요, 평온, 여유가 있었다.
오롯이 홀로
호텔에 남은 나는 우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른 남짓한 세월 동안 침대를 써본 시간은 10년도 되지 않았다. 오랜만의 침대는 구름처럼 보드랍고 포근했다. 잠들락 말락 하는 상태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짐을 정리하고 비치된 샤워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고 노트북을 책상에 놓았다. 미리 챙겨온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도 저녁이 한참 먼 시간이었다. 시간이 참 느릿느릿했다. 열심히 뛰기만 했던 내게 얼마나 오랜만에 찾아온 안식이었는지, 나는 창문을 열어 바깥바람을 좀 쐬다가 캐리어에서 입욕제를 꺼냈다. 직전에 다닌 회사에서 선물 받은 것이었다. 호텔 화장실에 욕조가 있어서 물을 받아 입욕제를 풀었다. 뜨겁고 향기로운 물에 몸을 담갔다. 대중목욕탕이 아니라 혼자서 전세 낸 욕조라니. 별일 아닌 것 같았지만, 너무 평화롭고 나른한 시간이었다. 그 욕조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시간에서조차 벗어난 듯한 그 감각은 지금 떠올려도 참 황홀하다.
욕조에서 몸을 푸는 동안 과거를 떠올렸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애썼는지. 또 친구나 지인에게 미움받을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삼켰던 적은 얼마나 많았는지. 끝없는 자기 검열과 완벽주의에 나의 마음은 서서히 닳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부드러운 표면도 날카로운 모서리도 있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매끈한 구가 되어버렸다. 매끈하니 누구나 와서 내 마음을 쉽게 만지고 갔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손이 타는 내 마음이 점점 싫어졌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닳아버린 마음은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모서리가 없으니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불안정한 바닥에서 이리 튀고 저리 부딪쳐 긁히고 상처가 났다.
내 마음을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다른 사람들일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함부로 대하게 둔 나였다. 나는 내 마음을 처음으로 어루만졌다.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줄걸. 나처럼 누군가를 잘 사랑하는 사람도 드문데. 나는 이 아까운 마음을 나를 위해 쓸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나는 욕조 물과 함께 과거의 후회를 흘려보내고 다짐했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꼈으니, 이제는 나를 사랑해보자고. 나를 먼저 잘 사랑한 후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