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6편
부침개 담당의 분노
다음날 오빠는 약속대로 나와 함께 할머니 댁에 가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할머니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부침개를 부치고 계셨다. 내가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도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나는 부침개 대신 반찬과 국을 준비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부침개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어쨌든 거의 다 나 혼자 했고 오빠는 할아버지를 도와 안방을 청소하느라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내 비밀을 아는 오빠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만은 든든했다. 이대로라면 평온하게 흘러가 명절에 큰소리 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작은엄마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작은엄마는 반찬을 준비하려고 할머니 댁에 온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할머니가 부침개를 부치는 것을 보더니 의아스럽다는 듯 말씀하셨다. “왜 할머니가 부침개 하고 계셔? OO이가 부침개 담당인데.” 순간 목구멍으로 화가 치밀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했나. 자기들이 하기 싫어서 나한테 미룬 거면서.’
작은엄마의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리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저 웃어넘기며 남은 일들을 재빠르게 하고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고 둘러대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오빠도 나와 비슷한 시간에 할머니 댁을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작은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침개 담당. 아,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리고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착하게 참고 살아온 결과가 그런 별명이라니. 그게 사람들에게 박힌 내 인식이었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끝에 나는 당연히 남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게 마땅하다고 여겼고 내가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도 하기 싫을 때가 있는데, 왜 말하지 못했을까.
서러움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정말 마주치기 싫은 아빠와 마주쳤다.
효자 아빠에게 토해낸 마음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에게 참 잘하는 효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리거나 찾아뵙고 한 달에 한 번 작은아빠들과 모여 할머니 댁에 가서 얼굴을 비추는.
그러면서도 시댁을 흉보는 엄마에게는 모질었다. 시댁 문제로 싸울 때면 아빠의 말에는 늘 당신이 큰아들이고 엄마는 그 큰아들에게 시집을 온 큰며느리이니 당연히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효심으로 모셔야 한다는 식의 논지가 깔려 있었다. 그런 아빠니까 내가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서 일하는 것도 당연시했다. 그게 자식으로서 할 도리라고 생각하니 엄마나 내게 고마워한 적도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엄마나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빠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낀 문제가 등장하면 절대로 굽히지 않고 일방적인 이해를 바라는 아빠가 미웠다. 하필 그 사소한 미움이 쌓이고 쌓인 데다 ‘부침개 담당’이라는 말에 화가 치밀어 터지기 일보 직전에 아빠가 내게 물었다. 어제 새벽에 경찰이 찾아오게 만든 인터넷 게시글 내용이 대체 뭐냐고.
나는 이미 작은엄마의 말에 기분이 상해 있었기에 삐딱선을 탔다. 처음에는 그냥 이야기하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아빠가 되어서 어떻게 모른 척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 경찰이 찾아왔으니 어차피 언젠가 내 비밀을 물어보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싸우게 되더라도 말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 대신 신신당부했다. 제발 판단하지 말고 들어달라고. 아빠는 알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퇴사와 우울증, 자살 충동을 비롯해 최근 심리상담을 받게 된 이유까지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이번 명절에 정말 할머니 댁에 가기 싫었다고, 앞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빠는 불만에 찬 듯 퉁명스럽게 그럼 안 가면 되잖아, 라고 답했다. 그때부터 이미 기분이 상했다. 그러면서 할머니 댁에서 명절마다 작은아빠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여자들만 일하는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싫다고, 할머니도 매년 힘들어하시면서 왜 그렇게 미련스럽게 손수 음식을 준비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러자 아빠는 또 할머니 편이었다. 할머니는 자식들을 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해주고 싶으신 것이라고. 그 말이 나를 탓하는 것처럼 들려 나는 더 울면서 소리쳤다. 아빠는 늘 이런 식이라고. 판단하니까 뭐 하나 말하기가 싫다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그간 내가 일한 건 다들 명절마다 일하기 싫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늦게 나타나는 작은엄마들 때문이었다고, 큰며느리라서 늘 먼저 고생하는 엄마 때문이었다고.
한참을 쏟아낸 끝에 눈이 퉁퉁 부은 채 숨을 씩씩댔다. 좀 후련하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걱정되었다. 아빠의 표정을 살펴보는데, 눈을 감고 있던 아빠가 눈물을 보이셨다. 그러면서 아빠가 내가 그렇게까지 힘든 줄 몰랐다며 뭐든지 알아서 잘하는 야무진 딸로만 생각해왔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사교육 없이 공부도 곧잘 했고, 대학교 때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어서 썼다.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도 효도하려고 애썼다. 누가 보아도 모범적인 삶이었다. 그게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어쨌든 아빠 눈에 내가 그런 딸로 비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빠는 당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셨다. 공업 고등학교를 나오신 아빠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들 사이에서 괴롭힘도 많이 당해봤고 그게 참 상처였고 힘들었다고 하셨다. 마지막에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힘든 것을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그런데 내가 힘들다는데, 왜 아빠 이야기가 나오지. 의문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아빠가 불쌍했다.
상처받은 내면이 치유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아빠는 알게 모르게 나나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게, 말로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 아빠도, 아니 어쩌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분노를 터뜨렸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내 마음을 비우고 나니 다른 사람의 힘듦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쩌면 나는 내 감정을 토해내지 못해서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아빠도 제때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에 힘드셨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생각이 들면서 역시 가족에게 털어놓기를 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를 가장 어려워하는 나에게는 최대의 난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