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파업 4편
머나먼 과거로부터 시작된 감정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가족에 대한 내 감정을 돌아보고 털어놓으며 후련함을 느꼈다. 그러나 내 감정은 대부분 과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거의 20년이나 더 전의 일부터 내 슬픔과 좌절이 시작됐다. ‘집에서 팡팡 놀면서 유세’라는 엄마의 말은 최근에 들었지만, 왜 그 말에 아득한 과거까지 한꺼번에 생각나는 것일까. 그리고 누구나 겪을법한 일로 이렇게까지 힘들 수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심리상담 책을 보면서 어린 시절에 겪은 큰 사건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경우 가장 큰 트라우마는 어머니의 수술과 간병이었다. 나는 의존 욕구를 충족해야 할 나이에 부모님께 의존하기는커녕 도리어 누군가가 내게 의지하는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 그때는 내가 어머니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내가 아빠와 오빠에게 식사를 차려주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집에서의 내 역할을 ‘리틀 맘’이라고 부르셨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심리상담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왜 유독 나에게 의존적인 친구들이 많았는지, 왜 그들의 일방적인 의존이 괴로우면서도 죄책감 때문에 떨쳐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내 어린 시절이, 가족 내의 역할이 나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때부터 내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수용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예전부터 많은 심리상담 관련 영상을 보며 내가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줘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가족을 돌보기 힘들어 때로 화가 나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가지는 나. 가족이 밉지만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비난하는 나. 이런 내 모습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서 기대하는 역할을 내가 나에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나를 인정하고 아껴주며 사랑해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족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
나를 이해한 후에는 매주 한 번씩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하는 일이 조금이나마 즐거워졌다. 심리상담사 선생님께서는 아무 편견이나 판단 없이 내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해주셨다. 내가 나에게 해줘야 할 역할을 일부 맡아서 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족들이 내가 매주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한 것이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고 어차피 퇴사 후 힘든 마음은 가족 모두가 알았기에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고만 말하고 자살을 생각했다는 사실은 숨겼다.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함께해서 그런지 가족에게 비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왠지 불편했다. 게다가 가장 자주 얼굴을 보는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무엇보다 제일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가족과의 관계를 해결할 수 없으니 심리상담을 받아도 내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복잡한 두려움과 막막함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라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으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는 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심리상담사 외에 누구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친구들을 떠올렸지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좋은 친구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자살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꺼내는 것도 불편했다. 막상 내 외로움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공허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마음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조급함이 더해져 나는 충동적으로 N포털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누구라도 좋으니 내게 죽지 말라고 말해달라는 질문 글을 올렸다. 한 답변자에게서는 따스한 대답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은 내게 그래도 부모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답글을 달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내 가족사를 줄줄 써서 답변을 달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도의를 내세우는 낯선 이를 향한 날선 원망이었다.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날의 충동적인 행위가 생각지도 못한 나비효과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