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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뽁이 May 03. 2024

3. 새벽 2시의 낯선 손님 (1)

착한 딸 파업 5편

새벽 2시의 낯선 손님

 N포털에 익명으로 죽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글을 쓴 날 밤이었다. 당시 나는 심란한 마음에 이불 위에서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가족들의 발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나는 현관과 가장 먼 방에 있어서 뒤늦게 소리를 듣고 나갔다. 나가보니 노란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세 명이나 우리 집 현관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과 부모님, 오빠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꽂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경찰 중 한 분이 나를 보며 “OOO씨예요?”라고 물어보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경찰은 내게 무슨 일 없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자살하려고 한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이런 식으로 내 자살 충동을 알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냥 좀 힘들었다는 식으로 썼다고 얼버무렸다. 경찰과 나 사이에 미묘한 시선이 오갔다. 그는 내가 가족에게 나의 속내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경찰은 가족에게 나를 잘 챙겨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새벽에 잠이 깬 가족들은 놀랐다며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정확한 게시글 내용은 몰라도 심각하려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별거 아니라며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오빠와의 심야 카톡

 경찰들이 떠나고 집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놀란 심장이 쿵쾅댔고 눈알이 불안해하며 떼구르르 굴렀다. 어쩌지. 가족들이 분명히 물어볼 텐데. 뭐라고 말하지. 정말 말하기 싫은데. 온갖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가족들에게 비밀을 만든 것이 내심 불편했던 터라 그랬다.


 어차피 들킨 거 다 말해버릴까. 말하지 않으면 내게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과 더 갈등이 깊어지기만 할 텐데.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올 텐데. 경찰이 찾아온 시점에 솔직히 시간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내 진심을 털어놓기 편한 오빠에게 먼저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그렇게 옆으로 돌아누워 오빠에게 자는지 물어보는 카톡을 보냈다. 오빠도 심란했는지 안 잔다며 답장을 해줬다. 나는 오빠에게 사실 N포털에 죽지 말라고 말려달라는 글을 올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할머니 댁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마침 그날은 설 연휴 전날이었기에.



착한 딸의 명절 노동

 할머니 댁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의 배경을 조금 설명하자면 이렇다. 할머니 댁은 우리 집과 가까웠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면 할머니는 꼭 우리 집에 전화해서 큰며느리인 엄마를 불렀다. 그러면 나도 세트처럼 엄마를 따라갔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설 명절에 일을 돕곤 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몸이 약하니 도와드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슬슬 눈치를 보며 우리보다 늦게 오는 친척들이 하나둘 앞다투어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도와드리니 효녀라고. 이제는 그 말이 곱게만 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착해서 칭찬받는 사실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엄마에게는 쉬라고 하고 내가 일을 도맡아서 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배추 부침개를 부치는 일이 내 임무가 되었다. 그렇게 거의 20년을 명절이면 할머니 댁에 가서 일하곤 했다.


 처음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저마다 그럴듯한 사정을 대며 늦게 오거나 얼굴을 비추지 않는 친척들이 미워졌다. 직장에서 일한다든지 약속을 잡았다든지 가족여행을 간다든지. 그리고 가부장적인 분위기로 부엌에 얼굴도 비치지 않는 남자들도 미워졌다. 친척들에게, 남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뭐 한가해서 오나. 우리는 뭐 가족여행 안 가고 싶어서 할머니 댁에 오나. 두세 시간을 넘도록 앉아서 부침개를 부치고 있으면 허리도 아프고 기름 냄새에 질려버리곤 했다. 무엇보다 속에서 화가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의 시댁 욕도 한몫했다. 



오빠에게 토로한 명절 스트레스

 위와 같은 이유로 설 연휴 첫날에 할머니 댁에 가서 배추 부침개를 부치는 것이 거의 나의 임무나 다름없어졌다. 이후 내 안에 불만이 가득해졌지만, 명절마다 아들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할머니 때문에, 할머니를 너무 사랑하는 효자인 아빠 때문에 억지로 참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우울증이 심해서 누가 툭 찌르면 소리부터 지를 것 같았다. 제발 나 좀 내버려두라고.


 오빠에게 이 모든 감정과 생각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오빠는 카톡으로 같이 가줬으면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내 가족 중 한 명에게 나의 비밀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 경찰이 찾아와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 속에서 아픈 감정이 더 곪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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