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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뽁이 May 22. 2024

4. 나를 돌본다는 것 (2)

착한 딸 파업 9편

무기력증에서 한 발짝

 호텔에서 1박을 마치고 돌아오자 놀라울 만큼 힘이 솟았다. 그동안 무기력증이 심해서 PT도 겨우 갔는데,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졌다. 익숙하게 동네 구인 어플을 켜서 최신 단기 아르바이트 공고에 빠르게 지원했다. 거의 한 달 만에 나간 아르바이트는 어색했지만, 기운이 나서 할 만했다. 그리고 단 하루였지만, 내 가치를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전까지 무기력증이 너무 오래 가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막상 기운이 돌아오니 기쁘면서도 신기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뭘 해도 소용없을 것 같고, 죽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심리 관련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무기력증이 심한 우울증 환자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이대로 쭉 쉴까 봐 불안해하지만, 실제로는 쉰 다음에는 에너지가 충전된다는 이야기를 읽었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었다니! 솔직히 그 대목을 읽을 때만 해도 사람이 쉬면 더 늘어지고 쉬고만 싶어지지 않나, 라고 의심했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충분히 쉬고 내 마음을 돌아본 후에야 힘이 나고 의욕이 생겼다. 쉬는 것은 곧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내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게는 쉼이 필요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나를 돌볼 시간이. 내 방을 아무 때나 두드리는 가족에게서, 부엌과 거실의 소음에서 벗어날 시간이. 호텔 투숙 경험으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들었을 때, 2023년부터 계획한 자취의 꿈이 더 선명해졌다.     



독립 선언

 때마침 취준생 신분에서 벗어났다. 당시 나는 총 세 군데에 입사 지원했었고 그중 한 군데는 면접 일정이 겹쳐서 포기, 한 곳은 면접에서 탈락했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곳에서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지막 면접은 이미 우울증이 많이 완화되어 자신감이 회복된 상태였다. 솔직히 더 준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그냥 자신감 있어 보이게만 하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여기 말고도 갈 데 많다’라는 당돌한 자세로 임했던 것 같다. 그 당당함이 나를 합격시켜 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생계 수단이 생기자마자 나는 1년 전부터 쭉 생각해오던 독립과 자취 계획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이 너무 간절히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호텔 투숙 경험을 하면서 확신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너무 평온했고 행복했으며 집중력도 올라갔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글쓰기에 원없이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자취의 필요성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가 나를 돌본다는 감각이었다. 먼저는 감정적인 돌봄이었다. 가족들보다 나를 우선시하며 어리광도 부려보고 힘든 내색도 해보니 숨통이 트였다. 둘째는 실제적인 돌봄이었다. PT를 받으며 식단 관리를 위해 내가 먹을 음식을 내 손으로 차려 먹을 때 얼마나 소소한 기쁨이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나를 챙기는 수고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혼자 있는 시간, 내가 나를 돌본다는 감각은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만큼 값진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살아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시기에 대략 얼마만큼의 돈을 모아놨다고 말씀드렸다. 원룸 월세 시세를 고려했을 때, 수입이 없는 상태로 살아도 1년은 거뜬히 살아낼 수 있는 목돈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그만큼을 저축했다는 사실에 놀라셨고 아빠는 이런 점은 배워야 한다며 엄마를 향한 핀잔과 나를 향한 칭찬을 겸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냈다.


 하긴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긴 했다. 남들보다 길게 직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중도에 퇴사가 잦았기에 공백기가 꽤 있었는데도 적지 않은 돈을 모아놨으니까. 익숙한 가난이 선물한 아끼는 습관 덕분이었다. 씁쓸하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구체적인 예산을 책정하고 최종 합격한 직장 근처의 원룸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보증금과 월세, 원룸의 조건 등을 고려하며 거의 스무 군데 정도는 다닌 것 같다. 집을 보러 다닐 때도 나를 돌본다는 감각에 즐거웠다. 집 보러 다니며 건축물대장, 등기부등본을 공부할 때는 골치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내가 나를 독립시키기 위한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인 독립에 불과했다. 심리적인 독립은 별도의 문제였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리적인 독립을 위한 필연적인 갈등을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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