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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뽈삐래 Jul 23. 2022

02. 워홀러의 워킹 라이프

#4 그녀의 이름은 루시


삐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들은 모두 일로 만난 사이였다. 그들과 사적으로 이뽈과 같은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고, 공적으로만 사람을 대하다 보니 친구를 사귀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다. 더군다나 심사숙고하여 친구관계를 형성하는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여러 단계를 만들어 최종까지 통과한 사람들만이 내 사람들이라 칭했고, 그들과만 속 깊은 교류를 했다.


 고민하고 의심하며 관계를 맺으려 했던 나만의 룰을 박살 내고 꼬마 아이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것이 좋아 순수하게 친구가 될 수 있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해 준 친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매력적인 그녀, 루시

 연어 공장 사람들은 대부분 루시를 좋아했다. 그야말로 인싸 중에 파워 인싸. 평행선의 끝과 끝처럼 나와는 정반대인 그녀가 그저 신기했고 자꾸 눈길이 갔다. 예전 같으면 친구 하자고 먼저 다가와도 뒷걸음질 치며 손사래 쳤을 텐데 이상하게 친해지고 싶었다. 왠지 모를 인간적인 끌림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의 매력에 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우연히 루시와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워홀러라면 한 번쯤은 주고받았을 스몰 톡을 시작으로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면서 친해졌다. 일이 일찍 끝난 어느 날, 난데없이 그녀가 단둘이 카페를 가자고 제안을 했다. 둘이? 갑자기? 살짝 놀랐지만, 친해지고 싶은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니 내심 좋았다.


 우리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넘어 고단하게 살았던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항상 웃고 걱정 없이 지낼 것만 같던 그녀의 내면 한 귀퉁이엔 힘듦과 걱정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렇게 맘을 터놓고 스스럼없이 말을 해준다는 건 나를 믿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믿고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루시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놀랍도록 신기했던 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땐 영어가 걸림돌이 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루시와 대화를 할 때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끊기지 않았었다. 내가 개떡 같은 영어를 구사해도 루시는 찰떡같이 다 이해해 주었다.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한 스탭 전진했다.


 이뽈이 엘리스 스프링스 지역으로 떠난 뒤, 루시가 남자 친구와 함께 살 곳을 찾았다. 집주인에게 혹시 빈방에 사람을 들이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의 하우스메이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즈음 그녀의 남자 친구가 자주 메인랜드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우리 둘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매일 같이 수다의 세계에 빠졌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정말이지 끊임없는 수다였다.


 평범한 주말 오전, 루시의 느닷없는 제안.

"메리, 우리 브루니 아일랜드 안 갈래?"

"지금?"

"응, 지금!"


우리는 바로 짐을 챙겨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즉흥 여행은 말만 들어봤지,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떠나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불안하면서도 설레었다. 뚝딱거리는 나를 보며 루시는 재미있어했다. 우린 차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멋있는 풍경이 나타나면 한참을 앉아 구경했다. 연어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가 브루니 아일랜드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곧장 그녀를 찾아가 함께 신나게 놀고, 심지어 하룻밤 신세까지 졌다.

호주 브루니 아일랜드

 다들 이런 경험은 있을 것이다. 어색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순간순간 찾아오는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온몸이 배배 꼬이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머리를 바쁘게 굴렸던 적. 1분 1초가 억겁의 시간 같아서 자꾸만 시계를 쳐다본 경험 말이다. 그러나 찐친과 함께 라면 서로의 숨소리만 들린다 할지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루시와 내가 그랬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1박 2일의 여정 동안 어찌 항상 시끌벅적 했겠는가. 중간중간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묵언 타임. 그러나, 놀랍게도 어색함의 ‘이응’도 내밀 수 없을 만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브루니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내 루시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함께 한 시간 동안 우리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들었고, 국적을 뛰어넘어 단단하고도 깊은 우정을 쌓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신념을 몽땅 흔들어 놓은 마력의 친구이며, 내 친구라고 당당히 소개할 수 있는 사람, 바로 루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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