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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순 Oct 23. 2020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따라오라고 했더니 왜 씹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봉사활동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막 중학생이 된 나와 두 명의 친구들은 봉사활동 점수도 받고(봉사활동에 점수를 매기다니, 학생들을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다) 중학교 생활을 의미 있게 시작해보고자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남들을 위하는 일에 쏟아부은 후였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던 곳이라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돌아오던 길, 우리 옆으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세명의 형들이 지나갔다.


“야 도망가자 저 형들 이상해” 내 떨리는 목소리에 친구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도망을 가” 하지만 불행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느새 세 명의 양아치가 우리를 골목 으슥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따라오라고 했더니 왜 씹어 이 자식들아” 


찰싹 찰싹 찰싹. 세 번의 건조하고도 찰진 살갗의 마찰음이 귓가에 울리더니 이내 윙- 하는 이명으로 바뀌었다. “너네 얼마 있어? 돈 가진 거 다 내놔” 각자 주머니에서 코 묻은 돈들이 천 원 이천 원 나오기 시작했다. “야 진짜 이거밖에 없어? 더 나오면 10원당 한 대야” 그 당시에도 이미 식상했던 대사가 들려왔다. 헌데 무슨 깡에서인지 주머니에 이천 원이 더 있었던 나는 “이게 다예요 뒤져 보세요”라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엔 우리 만나지 마라”라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좁디좁던 골목 안에서 뛰쳐나올 수 있었다.


“어디서 맞은 거야?” 부어오른 내 따귀를 본 옆집 형이 부아가 치민 표정으로 물었다. 형이 소위 말하는 근처 중학교 짱이었어서 인지(그땐 이렇게 불렀다) 나를 걱정해주던 그 말이 꽤 위로가 됐다. 봉사활동을 다녀오던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커지면 꼭 그 양아치 녀석들을 만나서 되갚아주겠다고. 그리고서는 거짓말처럼 갑자기 키가 커졌다. 아침에 온몸이 쑤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통을 겪더니 두 달만에 18cm가 컸다. 안타깝게도 그 후로 그런 양아치들을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의 고향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에 가면, 더 먼 곳으로 가면 이런 구차한 일들에 얽매이지 않는, 더 멋진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바다를 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오게 된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겨우 몸하나 누울 수 있는 작디작은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학교에 가면 드넓은 캠퍼스가 내 것 마냥 느껴졌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마주하게 된 내 미래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매번 경제가 힘들다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취직 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많은 대외활동과 봉사활동, 영어점수, 인턴십까지 취직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왔지만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지금은 더 심각한 상황이겠지만, 그때 역시 나름대로 전례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때 우연히 듣게 된 한 노래가 내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스포츠 응원가로 워낙 많이 쓰여서 많은 이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노래의 제목은 바로 유정석의 <질풍가도>. 나중에서야 이 노래가 <쾌걸 근육맨 2세>라는 투니버스의 만화영화 주제곡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학교 축제에서 응원단이 이 노래에 맞춰 퍼포먼스를 할 때는 마치 중학교 시절 나를 걱정해주던 싸움 잘하는 옆집 형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만화영화 <질풍가도>


지금 돌아보면 크지 않은, 하지만 그때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인생의 고비 같은 상황들이 찾아왔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힘이 났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이 노래를 듣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 노래를 듣고 힘을 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온 것만 같은 지금, 한 번 더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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