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책을 읽고 약간 갸우뚱하는 부분 있어, 다른 현대사 책을 찾아보게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서방세계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조선 백성은 나라가 없어졌는데도 저항하지 않았다. 라는 부분들이 의문을 자아내게 만들어 도서관에서 다른 현대사책을 찾게 되었고, 그래서 읽게 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이다.
<책 주요 내용 발췌>
여운형은 1930년대 말경부터 일제가 위태로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이 있자마자 바로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해나간다.
한글이 국민문자가 된 것도 사실은 해방이 되면서다.
미군은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미군이 1945년 당시 비행기에서 뿌린 포고 1호, 2호를 봐라. 점령군이라고 스스로 딱 못을 박았다.
국내에 사회주의가 들어온 것은 1910-1920년대. 지하 조직 중 가장 강헸던 것은 조선공산당. 전세계적으로도 공산주의가 그렇게 강렬했던 곳은 드물었다. 일제의 억압이 워낙 악랄했기때문에 반대 세력 중에서도 급진적 주장을 하는 곳이 세를 얻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키운것도 분단의 큰 요인이 되었다. 친일파눈 출세욕구가 강한 집단이고 생존능력이 탁월한 자들이었다 그런 친일파가 힘을 갖고 있는 한 통일정부를 이루기는 어려웠다
이승만은 너무 빠르게 1946년 1월 이미 단정노선을 지향한다. 이승만이 분단에 미군정,소련 못지않는 책임이 있다.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논의가 있을때 신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김규식이 수반이 될것이다 라는 보도가 있었다. 권력욕이 있던 이승만은 이 보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단정운동을 강하게 폈다
소련은 38선 이북에서 간접통치를 미국은 군정응 설치하여 남한에서 직접통치를 했다
1946-1948 정치과정을 보면 남쪽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난다는것은 눈곱만큼도 가능성이 없었다
그당시 이승만 추종자들의 잘못: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 친일, 분단정부를 강하게 몰고갔다는 점, 이승만 독재에 적극 가담
1946 대구항쟁(10월) : 경찰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의 악질 행위가 원인.
1948 4.3사건 : 남로당 중앙당 혹은 북한이나 소련의 지시 없었다. 중앙당 지령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현지의 남로당이 일으킴. 제주도민 10분의1이 학살당함 (2.5만명-3만명)
1950 5.30 선거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이 참패하고 중도파 민족주의자 약진
1969년 조사에서 통일을 꼭 원하는 비율 90%를 넘음. 1980년대까지도 그러했음
1948.12.12 유엔결의: 5.10 총선거가 치러진 지역이 한국내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발표. 38선 이북지역의 정부는 승인하지도 불법정부라고 규정하지도 않음
1919년 이승만은 독립이 아니라 국제연맹위임통치론을 주장하여 독립운동전선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재미동포들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어떻게 사용했냐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925년 탄핵당해 임시정부 대통령자리에서 쫒겨나고 1960년에 419혁명으로 쫒겨난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시절 상해에는 거의 머물지않고 미국애서 편안한 생활을 할 뿐이라는 비판응 많이 받았다.
동남아국가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한때는 발전을 하는것처럼 보이다가 뒤쳐지게 된 이유 토지개혁이 안되어서이다. 아시아 4마리용과 일본의 공통점은 모두 토지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의 지주들이 살아가는 것을 굉장히 어렵게 만들었다. 무상 몰수였을 뿐 아니라 거주기를 바꾸게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대거 월남을 해버렸다. 북한에 대해 얼마나 강한 적개심을 가졌겠는가. 이 사람들이 내려올 때 토지문서를 많이 가지고 왔다. 북한이 망하면 다시 찾겠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 받은 비율 : 1911년 1.7%, 1929년 18.6%
해방후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아짐. 이승만이 의무교육을 확대한 공적은 인정할만하다.
해방직후에는 그렇게 혼란이 없었다. 미군정이 설치되면서 오히려 혼란이 많아졌고, 이는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하면서 그런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승만이 반민법을 공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공포하지 않으면 양곡 관리 법안 같은 것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경찰에 습격당하고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고 버팀목이던 김구가 암살되면서 친일파 처단은 유야무야 되고 만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였다.
친일파가 대량으로 생겨나게 된 것은 1937년 중일번쟁 이후 전시 체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거세지면서 부터이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간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되는 것 : 해방 후 노덕술에게 악질적인 고문을 당해서
주사파가 생겨난 이유 :반공 이데올로기에 채색된 흑백논리만 통용되고 있으니 극우의 정반대인 북한의 항일무장투쟁, 토지개혁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 측면이 있다. 남쪽이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였으면 주사파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