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는 길, 찾아가는 길
어렸을 때 피아노, 발레 (3달 하고 그만 두었지만...), 수영 (배워봤자 지금은 다 까먹고 물공포증있음) 등 여러가지 학원을 다녔지만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공부는 글짓기였다.
일주일에 한 번, 나까지 4명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이 매 주 주제를 정해주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독후감도 많이 쓰고 논설문도 쓰면서 여러 가지 글의 형식에 대해서 배웠었다. 다른 학원들 가는 시간보다 난 유독 글짓기 시간을 좋아해서 엄마께 글짓기 더 많이 하면 안되냐고 묻기까지 했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난 유독 말로써 표현하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편하다.
글자를 하나 하나, 꾹꾹 마음을 담아 눌러 쓰다보면 어느새 머리는 정돈되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자를 채워가는 것이 재밌었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뭔가 쓰는 일에는 꼭 나를 시키셨다. 누구의 생일 카드라던지, 연하장이라던지, 크리스마스 카드라던지 하는 것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쓴다는 행위에 익숙해져버린 나였다.
겁이 많기에 읽고 겁이 많기에 쓴다.
학창시절에 안 좋았던 추억 때문일까, 트라우마가 있는지 유독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소심한 성격. 혹시나 날 싫어하면 어쩌지, 혹시 내게 상처받았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염려들로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 그로 인해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긴장되고 굉장히 신중해야 하는 행동이었는데, 글에 있어서는 내 생각을 자유롭게 써내려 갈 수 있었다.
책 안에서 내가 자유로웠듯이 글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한국 책이 귀해서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여기 저기 노트에 끄적거린 짧은 글, 시, 낙서들이 한 가득이다. 타향에 있으면서 모국어가 그리웠던 나는 쓰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난 한국어로 이렇게 나를 표현할 수 있어. 어느 나라에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 쓴다는 것은 어딘가에 속한다는 행위였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을 가르쳐주는 길이었다.
지금은 매 주 그래도 몇 개의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쓰면서 느는 것이 글쓰기라던데, 글쓰기를 통해 난 내 자신을 배웠고, 내 꿈을 알아냈다.
쓴다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찾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