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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Dec 10. 2021

당신은 그딴 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잖아

코리아 그랜마라는 요상한 캐릭터

어쩌다 100세 할머니와 3박 4일


박막례 할머니 브이로그를 보는데

그야말로 코리아 그랜마가 미국 대사관을 찢었다!

부엌을 장악하며 잡채 만들기를 진두지휘하는데  완전 시트콤이었다.

당근 썰어 놓은 걸 보여주며 칭찬받고 싶어 하는 미국대사.

아까보다 낫지 않냐? 며 만족해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자비 없는 돌직구를 날렸다.

“이거는 망친 거야 시방”


코리아 그랜마의 매력은 돌직구다.

이게 어째서 가능하냐면

코리안 그랜마의 인생에는 한, 흥, 정 이 세 가지가 믹스되어

그 돌직구는 대단한 폭발력을 가진다.

요상하게도 난 이 캐릭터에 빠지고 말았다.

어쩌다 코리아 그랜마가 우리 집에 잠시 왔다.

막내 이모의 긴 한국 방문으로 사촌들이 할머니를 모셨는데

그 사촌들도 여행을 떠나게 돼서 우리 집으로 3박 4일 여행 온 거다.


우리 집에 온 첫날, 할머니는 밤 12시가 넘었는데

“너희들은 밥 안 먹니?” 하셨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한식을 차렸다.

그 야밤에 두 그릇 뚝딱 하셨다.

내 머릿속의 100세와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00세 할머니의 브런치 루틴

11시 기상 후 할머니의 브런치 메뉴는 정해져 있었다.

보리 시리얼과 커피 한잔이었다.

우유에 견과류와 바나나를 말아서 같이 먹는 게 루틴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우유의 양이 많으면 안 되고

비벼먹듯이!

일생에 한 번도 건강검진받아본 적 없는 할머니의 밥상이다.

보리 시리얼은 사촌들이 키트로 전달해 줬다.

그 외에도 할머니 케어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는데

난 할머니가 샤워를 언제 하는지가 궁금했다.

놀라운 건 할머니는 샤워를 안 한다고 했다.

몰래 밤에 혼자서 씻는 걸까?

어떻게 할머니한테서 아기 냄새가 나는 거지?

정말 미스터리다.


손자의 아베크롬비 팬티는 처음이지?


할머니를 욕실로 유인해서 샤워하자고 꼬셨다.

내가 샤워기를 틀었더니

“난 뜨거운 물에 담가야 해.”

하면서 욕조를 가리켰다.

의외로 순순이 목욕을 한다고 해줘서 고마웠다.

할머니를 씻겨주는데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났다.

한 번도 우리 엄마를 이렇게 씻겨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혼자 씻길 수 없는 상태였다.

여러 명이 손을 합쳐야 겨우 씻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샤워 안 하겠다고 떼쓰는 엄마를

샤워기로 옷을 적셔버린 후 씻겼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다 대성통곡했던 날이 생각났다.


누군가를 씻겨 주는 건 조카 말고 처음이었다.

어린이를 씻기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할머니가 등을 밀어 달라고 해서 밀었을 뿐인데

진짜 어렸을 때 목욕탕 가서 밀었던 때처럼 국수가 나왔다. 그 순간 정말 청년의 등짝을 미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의심이 되었다.

할머니 진짜 100세 맞아?

내가 짐작하는 100세 노인은 이런 게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어째서 내 찌찌보다 할머니 찌찌가 훨씬 크고 빵빵하냐고?

왜 때문에 그런 거지?

할머니 몸의 부드럽게 살아있는 곡선,

여성의 몸은 어마어마하게 신비롭다.

강인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모든 인생을

그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늙어간다기보다는 익어간다는 말이 이런 걸까?


샴푸로 머리를 박박 문질렀는데도

머리 감는 건 비누로 자기가 해야 한다고 했다.

비누로 머리를 문지르는 감각,

할머니는 어떤 순간보다 오롯하게 그 순간을 즐겼다.

그런데 욕조에서 일어설 때 미끄러져 넘어질뻔했다.

그 순간 재빨리 내 손을 잡았고

할머니는 그런 두려운 순간을 이겨내고 목욕을 마쳤다.

할머니가 한 달 동안 씻지 않고 버텼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을 거다. 이모 없이 날 믿고 목욕을 했다.

목욕을 계기로 우리는 친해졌다.

어제까진 몰랐던 할머니와 둘만 아는 세상이 생겼다.

나는 할머니의 전속포토그래퍼

씻는 동안 할머니 옷을 세탁기에 넣고

씻고 나온 할머니에게

남편의 아베크롬비 펜티와

언더 해머 티셔츠를 입혔다.

세상에서 가장 힙한 할머니로 변신했다.

할머니 옷은 모두 핑크다.

그런데 할머니 이 핑크색 조금 지치지 않아?

이거 이모 취향인지 할머니 취향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

할머니 소지품 가방의 향수는 의외로 폴로 스포츠였다. 끝이 알코올 향이 나서 여름에 어울리는 향이었다.

 남자 향 수지? 계절에도 맞지 않고.

향수 넣어드리면 실례가 되려나

저녁 무렵 그걸 발견한 남편이 씩씩 거리며 2층으로 올라  샤넬 향수를 덥석 가져갔다.

“현진이 새로 사자.”

그 폭주하는 분노는 왠지 극적이고 강렬한 울림이 있었다. 나도 할머니에겐 샤넬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다음날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쬐어주고 싶은 내 욕심에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할머니는 조금 걷더니 보행기에 앉으려 했다.

나는 힘껏 밀었지만 내 근육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할머니를 번쩍 안아 들고 싶었지만

내 체력으론 부족했다.

이래서 사랑을 지키려면 근육을 키우라 했던가?


저녁에는 <한국인의 밥상>을 같이 봤다.

거기서 닭 김치 만드는 게 나왔는데 그런 걸 처음 봤다.

사과나 감으로도 깍두기를 만든다고?

쌍화탕 뱅쇼도 한 번 만들어 볼까?

이것저것 할머니와 해보고 싶어진 게 많아졌다.

신기했던 건 내내 기운이 없다가도

<전국 노래자랑> 송해를 보면 단숨에 기운을 차렸다.

할머니와의 3박 4일이 캠프에 간 것처럼 버라이어티 한 경험이었다.

도서관에 가도 짐에 가도 전전긍긍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빨리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내 루틴이 깨졌지만 그 안에 새로운 게 차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내겐 꿀맛 휴식이 됐다.

이 모든 게 계속 지속되는 거라면 못했다.

기간 한정이니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뽀뽀보다 보청기

자기 전엔 남편에게 할머니 뽀뽀 타임을 강요했다.

지금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실한 감촉, 뽀뽀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이불을 덮어 주는데

“내일 보청기 하러 가면 안 돼?”라고 하신다.

남편은 이모가 해준 보청기가 몇 개 있는데도 안 낀다고 이 말을 허투루 여겼다.

“요양원 친구들이 나한테는 말을 안 걸어”

지금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건 뽀뽀가 아니었다.

그건 친구였고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었다.

이모가 해준 보청기를 의심했다.

할머니가 안 끼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할머니한테 맞는 보청기가 세상 어딘가엔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내일 보청기 만들러 가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어기면 마치 나 자신을 배신하는 것만 같다.

보청기 만드는 일이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내가 답답해서 안 되겠다.

내가 할머니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할머니는 자기의 인생이 저물고 있다고 언제 느꼈을까?

책에서 본 건 100세까지 살면 60-75세가 최고 전성기라는 통계가 있다.

틀니를 하던 순간?

보행기를 잡고 걷게 된 순간?

혼자 목욕을 못하게 되는 순간?

일부 자식들에게 버려졌던 순간?

그래서 미국 요양원으로 오게 된 순간?


할머니는 맥심 골드가 싫다고 하셨어

내 생각엔 지금이 할머니 전성기다.

할머니가 둘째 날 말했다.

“이 커피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난 노란색 맥심 말고 빨간색 오리지널 먹어. “

그 순간은 커피 한잔이 나를 살게 한다는 에쿠니 가오리 같았다.

귀신이다. 이 맛을 구분한다는 건 믹스커피에 진심이라는 뜻!

한인마트로 달려가서 당장 빨간색 맥심을 사 왔다.

솔직히 내겐 똑같은 맛이지만 할머니에겐 다르다.

확고한 자기 취향을 사수할 있는 상태, 난 그게 전성기라 생각한다.


할머니는 자기 손으로 커피 타고 싶다고 내버려 두라 하셨다.

내손으로 타 먹는 커피, 스스로를 돌본다는 감각.

그 풍경이 좋아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맥심 골드인지 오리지널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

혼자서 커피를 타지 못하는 날도 오겠지

그날이 오게 되더라도 지금을 씩씩하게 만끽하자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자꾸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가 궁금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걸 할머니가 정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할머니가 말했다.

“넌 미국에 잘 왔어.”

어쩌면 정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할머니가 해줬다.

매일 매 순간 나 미국에 괜히 왔나? 나 망한 거 아닐까? 하는 막막한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할머니의 저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저렇게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미국에 잘 온 할머니가 되자.라고

조용히 다짐하던 아침이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보따리 장사처럼 헤맸다.

마음 둘 곳 같은 건 없었다

그곳은 바로 여기였다.

내 마음의 베이스캠프는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 세상 사람들이 말이 참 많아

자식들한테 일찍 돈을 나눠줘서 버렸다고

그런 말 상종하지 마

당신은 그딴 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잖아

어차피 돈은 진짜 자식과 호로자식을 걸러주는

도구일 뿐이야

지금 할머니 곁을 담담히 굳건히 지키는 건

자식보다 맥심 오리지널, 샤넬 향수

그리고 전국 노래자랑이 아닐까


할머니를 위한 웰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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