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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Dec 07. 2021

몰래 사진 찍고 싶은 집에서 나는 냄새

가족사진이 어디에 있는가?


햇빛을 쬐며 샤워할 수 있는 행운

미국에 와서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면

아무 날도 아닌 보통날의 저녁이었다.

마트에서 한쪽 팔이 없는 캐셔가 발랄하게 일하는 걸 보고

그냥 내 팔이 두 개다 있다는 것에 그 즉시 행복해졌다.


새롭게 무엇을 가졌을 때보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요상하게도 행복이 밀려온다.


요즘 이사 갈 집을 고르러 다니는데

내가 살 수 있는 집은 아직 없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고마움을 매일 느끼게 된다.

미국은 오픈 하우스 날의 시간대에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고 자유롭게 내놓은 집을 구경할 수 있다.

우리 형편에 맞게 구경하러 간 집은

일단 동네로 들어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와 비주얼적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대부분의 집들이

놀이동산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을 예쁘게 꾸며놨다.

그냥 잘해놓고 산다의 느낌이 아니다.

단순히 인생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의 집이구나

이런 게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을 디테일하게 표현해 놨다.

루돌프가 굴뚝으로 들어오는 동선을 장식한 집,

집 전체를 심플하게 동그란 조명으로 통일하고 색깔만 다르게 한 집,

미러볼로 조명의 움직임을 준 집,

캐릭터쇼로 스토리를 만든 집 등등

자기 손으로 집을 꾸민 성취감이 돋보이는 집들이 모여 있다.

그런 동네가 주는 에너지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집 구경하러 다른 동네에 와보니 그제야 알게 됐다.

집의 외관 모양이나 페인트가 오래되어 색이 바래진 느낌...

이런 전체적인 것들이 우리의 텐션을 떨어뜨렸다.


집안으로 들어 가자 마자 바로 우리는 답답합을 느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층고는 굉장히 높다.

한마디로 탁 트여 있어서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답답하지 않은 이유가

남편을 집돌이로 만드는데 한몫했다.

갑자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층고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층고가 높은 공간일수록 창의력이 높아진다는데

이제 내 창의력은 떨어질 일만 남은 건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또다시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2층으로 올라갈 때 거실 전체를 조망하며 올라간다.

매일 탁 트인 하이앵글로 거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안방 화장실에서 또다시 콱 조여 오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지금 사는 집은 샤워장에 햇빛이 들어온다.

큰 창문으로 호수가 보이고 오리가 뛰어노는 장면도 보인다.

햇빛을 쬐면서 샤워할 수 있는 게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걸어서 갈 수 있는 한인마트가 있다는 건 최고의 위치다.


그런데 현실은 이제 이런 모든 걸 뒤로하고

우리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해야 한다는 거다.

그 어떤 집을 봐도 지금 사는 집보다 별로였다.

“비단 고르다 삼베 고른다”는 말처럼 뭘 봐도 내 눈에 차지 않았다.


가족사진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


그런데 어느 날 시큰둥하게 집 구경을 하다가

처음으로 ‘이 집에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햇빛이 잘 들고 수압이 세고 외관의 컬러가 맘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 이유는 그 집에 걸린 가족사진 때문이었다.

그 사진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가

‘아 이 집에 살고 싶다’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날 이후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집 구경을 가면 가족사진부터 찾게 됐다.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얼마나 최근 사진인지 본다.

누군가는 졸업사진을, 누군가는 결혼사진을

또 누군가는 아무 날도 아닌 일상적인 사진을 걸어놓는다.

각각 특별한 순간은 다르지만

서로가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고 있다는 느낌은 비슷하다.

나 또한 같은 집에 살게 되면

이 사람의 현재가 곧 나의 미래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요상한 평행이론처럼


예전에 살았던 사람이 무슨 상관이냐고?

다른 시대, 같은 집을 보여주는 드라마 <와이 우먼 킬>,

소설 <완벽한 아내를 위한 레시피>를 보면

같은 집에 사는 운명들에겐 반복되는 역사가 있다.

어떤 흔적도 없이 오직 기운으로만 전해지는 것도 있다.

시간이 달라도 같은 집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에너지가 있다.

같은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잘되는 그런 실화는 천지 빼까리다.

나는 그 에너지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내겐 전 주인의 스멜이 중요하다.


신주쿠에 이케아 아파트라는 게 있다.

3평 안에 이케아 가구로만 꾸며져 있고 월세는 단돈 천 원이다.

1명의 입주자를 모집하는 이 이벤트에 수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전 주인의 스멜 말이다.

나는 그게 중요한 사람이다.


몰래 사진찍고 싶은 집


부엌 팬트리를 열다가 문이 묵직하길래 재껴봤더니

오 마이 갓!

문 뒤에 100개 정도의 시즈닝이 붙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즈닝이 거기 있었다.

시즈닝에 진심인 사람 같았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열해 놓은 그 열정이 부엌을 찢었다.


그 팬트리 비밀의 문이,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런 프라이빗한 모습은 감히 사진으로 담는 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 열정을 간직하고 싶어서.

내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 질까 집에 오자마자 후다닥 메모로 그려 놨다.

만나본적 없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 내겐 신선한 영감이 된다.

그래서 집 구경은 공짜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최고의 동기부여 같다.

갈 때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극을 받고

일기장엔 새로운 결심을 적게 만든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밥솥마저 당장 닦게 만든다.


집 구경에서 집주인의 사람 냄새만큼 중요한 게 있다.

짐이 꽉 들어차지 않았는지 그 집의 여백을 본다.

역시나 물건이 집을 압도 하는 집은

구경할 맛이 안난다.

여백이 있는 집은 공기가 순환된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에선 카펫에 그 냄새가 남는다.

카펫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미국식 주택의 최악의 단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백이 있는 집은

사람 냄새는 남고 나머지 잡내는 빠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에 여백이 있었나?

어서 가서 여백을 만들자!

가족사진은?

예쁘게 나온 사진 말고 빵 터지는 웃긴 사진으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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