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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Feb 10. 2022

코로나에 이겨도 도넛가게가 없어지면 지는거야

도넛 먹기 좋은 날

평소와 같은 날인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었다는 먼 북소리처럼

나는 종종 그런 목소리를 듣곤 한다.

“어서 노트북을 덮고 도넛 가게로 뛰어가라”

도서관에 왔는데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글도 써지지 않아

근처 도넛 가게를 검색했다.

그래 오늘이 바로 도넛 먹기 좋은 날이다.

미국은 도넛에 진심인 사람들이라 어디에든 도넛 가게가 널려 있다.

그런데 구글이 알려주는 장소로 분명 왔는데 내가 검색한 도넛 가게가 없다.

근처 한 바퀴를 빙빙 돌았지만 없었다.

폐업한 게 아닐까 했지만 당당히 지금 영업하고 있다고 나왔다.

그냥 근처 다른 도넛 가게를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요상하게도 이 가게의 실체가 궁금했다.

혹시 몰라 다른 앱에서 더블 체크를 해봤다.

세상에나 그런데 차를 타고 3분을 더 가면 나온다고 한다.


못생겼지만 내 인생 도넛이 되는 일

구글에 주소가 잘못 등록되어 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쿨함이라니

자기만의 모험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픈이라는 싸인이 없었다면 그냥 갈 뻔했다.

인스타 갬성은 1도 없고 오히려 공포영화 도입부처럼 오싹했다.

당장 총 들고 누가 나타날 분위기였다.

창문은 깨져 있었지만 명랑한 도넛 그림이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어젯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고 와서 그런지

핏자국만 없었지 좀비들이 싸우다 간 흔적 같았다.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다.

요상하게 그냥 가기엔 여기까지 찾아온 내 정성이 아까웠다.

문을 열어젖히자 테이블에 모든 의자가 거꾸로 올라가 있었다.

“코로나가 터져도 도넛 가게는 안 없어져

코로나에 이겨도 도넛 가게가 없어지면 지는 거야 “ (*어제 본 드라마 대사 패러디)

그런 의지처럼 보였다.

매장에서 먹을 수 없는 건가 하고 다시 나갈까 하고 또 한 번 고민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감싼 이방인 여성이 도넛을 팔고 있었다.

그 친구로 보여지는 사람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손님은 나뿐이었고 도넛을 사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끊어야만 했다.

다행히 매장에서 먹을 수 있다기에 도넛 추천을 부탁했다.

주인은 추천이라는 걸 처음 부탁받은 사람처럼 고민하더니

매대에 다 팔려버린 도넛을 추천했다.

나는 속으로 ‘다 팔리고 없는 걸 왜 나에게 추천하지?’ 했지만

그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표정을 믿었다.

내가 좋다고 했더니 주방으로 들어가서 도넛을 꺼내왔다.

뭔가 귀하게 아껴둔 걸 내오는 사람 같았고 그래서인지 더 기대가 됐다.

그런데 세상에!

그 도넛은 맛있는 모양도 아니었고 화려한 장식도 없고 특징도 없다.

그냥 사각형 위에 소스가 무심하게 올라가 심플했다.

혹시 망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꽈배기 모양의 도넛을 하나 더 추가했다.

추천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난 분명 사진 찍으면 이쁜 포토제닉 한 도넛을 골랐을 거다.

언제부터인가 본질인 맛이 아니라 인스타 갬성 사진을 위한 도넛을 골랐다.

인스타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아주 큰 걸 잃어버리고 살았다.

물론 찍을 때도 찍고 난 후에도 기분은 좋지만 맛은 없었다.

그런데 이 도넛은 인스타용은 아니지만 내 인생 최고로 맛있었다.

잘못된 주소를 다시 뒤져 찾아오는 정성,

깨진 창문을 보고도 들어갈 용기 그걸 이겨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맛이다.

포틀랜드에서 유명한 부두 도넛처럼 긴 줄도 없고 예쁜 핑크 박스도 없지만

휠 씬 맛있었다.

진짜 최고의 순간들은 어쩌면 인스타에 올리지 않고

그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생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화려하고 복잡한 맛의 도넛은 어디든 있지만

못생겼지만 이 심플한 도넛은 오직 여기에만 있다.

포틀랜드를 대표 하는 부두도넛


내게 중요한 건, 오리지널리티

손님이 없어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 수밖에 없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앞둔 고민을 이야기하는 건 같았다.

내 귀에 들어온 건 남편이 아이 컨택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내 곁엔 이 도넛 주인처럼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는 없지만

이 도넛 가게가 왠지 앞으로 그런 친구가 될 것 같다.

아니 왠지 잃어버렸던 친구를 되찾은 느낌이다.

가끔은 사람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공간이 있다.

구글에 주소가 엉터리로 올라가 있고

깨진 창문은 그림으로 때우는 도넛 가게라니

그 자유분방한 스타일에 진심으로 매료됐다.

사실 내게 도넛 가게는 도넛이 맛있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곳에 감도는 바이브나 그 공간에 스며든 느낌 따위를 좋아한다.

그런 오리지널리티라니 그 어떤 도넛 가게와도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현진아 산이 더 커지고 있어.”

옷을 정리하지 않고 쌓아두는 와이프와 살고 있는 남편은 종종 놀라곤 한다.

‘이렇게 안 치우고 사는 사람은 처음이지? 그런데 난 앞으로도 치울 생각이 없어 ‘

하고 그냥 밀고 나간다.

“현진아 산이 폭발할 거 같아”

남편이 이렇게 힘들어할 때면 종종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 위기에 휩싸이지만

오늘 이 도넛 가게를 다녀오고 난 더 확실해졌다.

이대로 괜찮지 않나?

이 엉망진창에서 나오는 인간다운 아름다움

이게 바로 그 누구와도 비슷할 수 없는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다.

그 도넛 가게처럼.

표창원의 책상처럼(너무 안 치워서 유명한데 선배들이 치워주면 화낸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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