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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Feb 03. 2022

내 인생 예고편에서 꼭 살리고 싶은 장면이 있어

왜 여행보다 예약 직후가 더 설레는 걸까?


"쏴라 있네~"

인생에서 가장 생기로 가득 차는 구간이 있다.

그건 바로 여행 예약을 갓 마쳤을 때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보통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인간이기에

사실 이 오롯한 재미를 맛볼 기회는 많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호텔과 비행기 예약을 확정하고 나면

내 머릿속에 이번 여행의 예고편이 지나간다.

물론 이 예고편과 실제 여행이 달라야 더 재밌지만

그 예고편은 나를 설레게 한다.


샌프란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그 여행을 하면서 다음 여행을 구상했다.

그 당시도 코로나 절정의 위기상황이었지만

‘이래도 되나?’ 하는 걱정으로 여행을 감행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역병은 계속 퍼져나가고 있고

우리는 서서히 이 상황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현재는 백신 접종증만 가지고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지만

지금도 한 달 후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만약 뉴욕이 봉쇄되면? "

"정말 망했네!"

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에 재빠르게 대처하자가 우리의 입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보다는 가슴을 졸이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인간들이 우리였다.


여행 예고편을 상상하다 정리되는 생각들

이번 뉴욕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호텔의 위치다.

내가 가장 로망 하는 센트럴파크와 브라이언 파크 바로 앞에서 자게 됐다.

그중에서도 센트럴파크에 있는 파크 하얏트는 내 인생 버킷리스트로

호텔 주변에서만 빈둥거리다가 와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이 겉멋을 위해 우리는 평소 지지리 궁상을 떨며 포인트를 모아 왔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호캉스고 진짜 호텔을 주인공으로

‘그럴 거면 뉴욕 왜 갔어?’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가만히 있다 오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 센트럴파크를 걷고 호텔에서 준비해주는 피크닉 조식을 먹는다.

센트럴 파크에서 뒹굴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에서 브런치를 먹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맛집 검색을 하지 않고 그냥 끌리는 가게에 들어가는 거다.

또 브라이언 파크 앞 호텔을 옮겨서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앞에 있는 뉴욕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있어도 난 행복한 인간이다.

처음엔 뉴욕 헌책방 투어를 막 돌아다닐 생각이었지만

내 돈 주고는 손 떨려서 못 가는 후덜덜하게 비싼 호텔 뽕뽑을 생각을 하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여행의 예고편을 상상해보니 지금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선명하게 알게 됐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내려놓게 됐다.

평소엔 유명한 곳을 동선별로 싸잡아 다닐 욕심에

‘여기도 가야 하고 저것도 먹어야 하고 그것도 봐야 하는데~’이런 지옥에 갇혔었다.

그런데 이번 뉴욕 여행의 콘셉트가 명확해지니 마음이 같이 상쾌해진다.

예고편을 그려보니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묘미가 있다.

오늘 아침도 내내 그 생각으로 도서관으로 오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예고편에선 하이라이트씬만 살아남는데

내 인생의 예고편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내 인생의 예고편, 상상해 본 적 있어?

내가 미국 오기 전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던 걸 내 조카가 물었다.

“고모, 그럼 앞으로 작품은 어떻게 해?”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똥쟁이 방구쟁이 떼쟁이 울보가 어떻게 작품이라는 단어를 알지?

조카의 눈엔 내가 게으르고 맨날 잠 만자고 맘에 안 드는 선물만 사 오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걸어 온길,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완벽히 이해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건 내가 가족들에게는 받아보지못한,

지지 라는 것이었다.


저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그때 내 속마음은 이랬다.

“고모가 드라마 계약한 회사랑 계약을 해지했어

그런데 고모 실력이 부족한 건지 회사가 잘못된 건지

아니면 외계인의 장난인 건지 아직은 알 수가 없어

고모는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그 이유를 꼭 적극적으로 나가 나서서 내 스스로의 손으로 밝히고 싶어. “

그게 내 인생의 숙제라고 착각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 내 실력을 증명하는 거라 믿었다.

그 설명할 길 없는 잔혹함을 털어내려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린걸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그게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지금은 내 조카가 던진 질문 ‘앞으로 내 작품이 어떻게 될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냥 그 실패를 그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내 인생의 예고편에서 꼭 살리고 싶은 장면

아무도 내가 이민 가는데 저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왜 일까? 저런 건 전혀 궁금하지 않았겠지?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을 예고편으로 만들 때 꼭 살리고 싶은 장면이 있다.

바로 저 순간이다.

저 장면을 살리려면, 편집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꼭 뒤에 만들어야 할 그림이 있다.

내가 미국에서도 계속 글을 쓰고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저 장면을 살려서 예고편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쭈구리지만 언젠가 이 쭈구리 시절을 대비시킬 출세를 하고 싶다.

적어도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처럼 보조금을 받고 단칸방에서

아기 돌보느라 글 쓸 여유가 없어야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되는데

난 우리 조카의 이 질문이면 충분한 것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기 싫고 매 순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민자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를 찾아가며 읽을 때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막막하다.

매일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내가 과연 쓸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내 인생 예고편에서 잘라내기 싫은

저 소중한 장면을 떠올릴 거다.

“고모 그럼 앞으로 작품은 어떻게 해?”


멀리 있는 유명한 작가의 성공스토리보다

나와 피가 섞인 작은 생명체가 던진 진심 어린 질문이

나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만든다.

언젠가 조카가 학교에서 달력을 만드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 달력에 내 얼굴을 넣었단다.

다들 피카추나 티아노사우르스 이런 거 넣는데 하필 내 얼굴은 왜?

네이버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서 굳이 거기에 나오는 못생긴 사진을 넣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 마음을 일렁이게 한 거대한 파도를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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