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Feb 14. 2022

포틀랜드엔 길바닥 냉장고가 있다

터프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두려운 일을 하라

어젯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투척한 영상은

‘두려운 일을 하라’였다.

이쯤 되니 유튜브 알고리즘은 신이 운영하는 AI 서비스 같다.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내게 필요한 걸 귀신같이 딱 골라서 들이민다.

난 이미 무의식적으로 두려운 일을 하고 있었다.

차를 버리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가고 싶었던 브런치 가게에 가는 길, 역시나 버스를 탔는데 타자마자 내리고 싶었다.

승객은 흑인 남자뿐이었고 그중 한 명은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턱스크, 즉 코는 가리지도 않고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코로나에 노출 안 되려고 아껴둔 몸인데

이 버스에서 무너지다니! 망했다 싶었다.

중간에 내려 그냥 가까운 아무 브런치 집을 갈까 하다가 꾹 참고 갔다.

내가 갑자기 내리면 괜한 오해를 살 거 같았다.

그들은 아무런 신경도 안 쓰겠지만 혼자 끙끙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진짜 오랜만에 생생한 두려움을 느껴봤다.


버스를 탔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

아직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잘 참고 가고 있는 나 자신을 셀프 칭찬했다.

창밖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데 신기한 걸 봤다.

프리 냉장고라고 적힌 냉장고가 위풍당당히 도로변에 서있었다.

대단한 브랜드 디자이너가 만든 법한 로고 같은 게 아주 크게 쓰여 있는 냉장고였다.

순간 너무 신기해서 돌아오는 길에 꼭 내려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도를 캡처했다.

돌아오는 길 역시 버스를 타는 건 두려웠다.

그런데 또 타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두려운 건 두렵다는 내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까처럼 버스 안 풍경은 비슷했다.

누군가가 한쪽 구석에서 기침을 했고 나머지는 불안에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내릴 때 사람들은 기사에게 모두 땡큐라고 인사를 했고 나도 따라 똑같이 했다.

아까 봤던 그 냉장고 근처에서 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어머나 여기에 또 현대미술이?'

아마 내가 차를 가지고 운전하면서 왔다면 절대로 못 봤을 거다.

두려운 일을 하라는 영상을 보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 보길 잘했다.

버스 타고 오길 잘했다. 중간에 안 내리고 꾹 참길 잘했다.


포틀랜드 길바닥엔 귀여운 냉장고가 있다


자세히 보니 포틀랜드 전역에서 벌이는 캠페인이었다.

자유롭게 음식을 기부할 수 있고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나 궁금했다.

그런데 손잡이가 더러워 만지기가 두려웠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었는데 괴상한 생물체라도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두려운 일을 하자’

열었더니 빵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포즈가 제각각이라 귀여웠다.

냉동실엔 아이스크림이 있을까? 하고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와서 그 냉장고에 적힌 슬로건으로 인스타 태그를 검색해봤다니

동네별로 이 프리 냉장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각각의 냉장고는 그 동네 사람들의 매력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어떤 냉장고는 앤디 워홀 같았고 어떤 건 힙합 어떤 건 명랑만화 같았다.

또 눈길이 갔던 건 냉장고에 태양광을 연결해

전기세를 내지 않아도 자동으로 냉장고가 돌아가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프리 냉장고 옆에 작게 만들어 놓은 팬트리에는

감자나 휴지 캔 수프 같은 게 올망졸망 줄지어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기 전에 누웠는데 그 프리 냉장고를 열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열어보길 잘했다.

그 헐렁한 냉장고가 주는 해방감!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왜 냉장고를 가득 채우다 못해 미어 터어 터지게 하고 사는 걸까?

우리 집 냉장고가 폭발하기 전에

서둘러 프리 냉장고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 부자의 최애는 벤 앤 제리 일기

자다가 일어나서 새 노트를 꺼냈다.

나의 사치스러운 취미생활, 새로운 일기장을 만들었다.

일기장을 개시하는 것엔 흥청망청 돈을 아끼지 않는다.

내가 지금 돌리고 있는 일기장은 예닐곱 개가 된다.

이들을 조금 터프하게 대한다. 그냥 자유롭게 굴러다니게 둔다.

각각 콘셉트가 달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돌려가며 쓴다.

10년 일기는 <밤의 서점>이라는 공간을 좋아해서 사버렸다.

매일 쓰는 감사일기는 민음사 일력을 한 장씩 찢어 그 앞에다가 쓴다.

여름에는 인스타에 맨발로 걷는 사진 일기를 썼고

트위터에는 갬성주식일기를 쓰고 있다.

최근에 가장 열정적으로 쓰는 건 벤 앤 제리 일기다.

벤엔 제리 아이스크림 본사엔 실패한 제품들을 기리는 묘비가 있다.

"피넛 버터 앤 젤리 :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조합!

근데 망해버렸고 여전히 샌드위치에만 들어가게 되었네!"

97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40여 개정도의 묘비가 있다.

홈페이지에 디지털 묘비도 같이 있는데 이걸 읽다가 너무 좋아서 따라 하기로 했다.

실패를 간직하는 이토록 귀여운 방식이라니!


정말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갖고 싶은 것 마저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런데 일기장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고 가질 수도 있다.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생각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생각을 바꾼다는 건 세상 이야기를 듣는다는 거다.

나는 오늘도 지금도 매 순간 변하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일기장에 사치를 부리는 이유다.

오늘 또 하나의 일기장이 탄생했다.

제목을 뭐라고 쓰지?

 ‘두려움 때려눕힌 일기’ ‘두려움 개나 줘 버려 일기’

‘두려움은 침대에 두고 나가는 일기’





작가의 이전글 집 사는 것 보다 두근거림을 따라가고 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