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망가뜨리고 알게 된 뜻밖의 수확
잘 해내고 싶었는데 자살골을 넣었다.
그날도 그냥 아주 보통의 날이었다.
요상하게 치폴레가 먹고 싶어 안 가본 가게를
더듬거리며 처음 가보기 전까진
분명 도착하자마자 싸한 느낌이 나긴 했다.
가게 밖 불은 켜져 있는데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나는 안을 확인하려고, 조금씩 뭔가에 홀린 듯 가게 앞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때 차를 대놓고 내려서 보기엔 보슬보슬 비가 내려 그냥 들이댔다.
안은 뭔가 어두 캄캄해서 닫은 건가 싶었다.
그러던 찰나 내 차가 뭔가를 넘어왔고 차 밑에 뭔가가 낀 느낌이 났다.
서예 할 때 종이를 고정시키는 도구,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딱 그렇게 생긴
콘크리트를 타고 올라갔고 당황한 나는 성급하게 후진을 했다.
그 순간 어떤 미스터리한 각도로 인해 차 바닥이 거기에 끼여 버렸다.
다시 한번 억지로 후진을 해서 빠져나왔는데
순간 망했다는 직감과 함께 뭔가 뿌직 하고 빠개진 느낌이 났다.
내려서 봤더니 차 조립이 풀려서 왼쪽 앞 범퍼가 내려앉아버렸다.
세상에 그 튼튼하다는 독일 명차가 이렇게 부서지나?
그때만 해도 레고처럼 어긋난걸 다시 손으로 끼우면 될 줄 알았다.
‘내가 이지경이 된 걸 이렇게 고쳤다고~’하며 나중에 보여줘야지 하면서 동영상을 찍었다.
날은 더 어두워졌고 혼자 발동동 구르고 있는 찰나
저 멀리 뽀샤시한 불빛과 함께 예수님이 나타났다.
진짜 여름 성경학교에 갔는데 예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치폴레를 먹으러 온 남자 두 명이 날 보더니 내려서 비를 맞으며 나를 도와줬다.
그들은 나의 구세주였다. 재빨리 지갑 속에 있는 현금을 확인하고
그들이 작업을 마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답하려 했다.
이걸로 평생 남편이 놀릴걸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전범죄로 만들어야 했다.
뭔가 대대적인 사고도 아니고 겨우 이깟 바보짓으로 평생 놀림당할 것 생각하니
현금은 물론 영혼까지 탈탈 털어 구세주들에게 모두 드릴 태세였다.
그들은 마치 차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처럼 보였고
범퍼를 열어서 이것저것 해보더니 결국 손만 더러워졌다.
집까지라도 차를 끌고 가려고 했는데 밑이 부서져 땅에 끌렸다.
그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남편에게 이실직고를 했다.
남편이 오는 동안 진짜 그 15분이 너무 길었다.
20년 장롱면허를 봉인 해제하고 1년 동안 깨끗한 무사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어이없는 걸로 내 무사고 기록이 더러워 지다니!
사고를 쳤는데 그 사고가 납득이 안 가기 때문에 억울했다.
그러니까 난 잘 해내고 싶었고 열심히 했는데 자살골을 넣은 선수 심정이랄까?
망가지면 망가진대로
남편은 빗속을 뚫고 공구함과 함께 나타났다.
그러더니 후레시로 차를 비추고 공구함에 있던 끈으로 밑을 잡아당겨 단단히 조여 맸다.
‘어머나 나 맥가이버랑 살고 있었네’
어젯밤까지 만해도 이를 안 닦고 자려고 온갖 핑계를 대는 일곱 살 같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인정! 조금 멋있었다.
한국이었다면 당장 보험회사에 전화해서 차를 견인해 갔을 텐데
미국은 어지간한 건 혼자서 처리하는 문화다.
미국 도로에는 망가진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도대체 뭘 했길래 차가 저모냥이 됐는지 의아할 정도로 시선 강탈하는 차들이 꽤 있다.
부서진 대로 얼르고 달래서 그냥 끌고 다닌다.
그냥 그 망가진 모습 그대로를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찢어진 청바지 구멍 난 스웨터처럼 오히려 스타일리시하게 보인다.
그런 차들에 절대 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우리도 낭만 있게 이대로 끌고 다니면 어떨까 했다.
지금 내가 갓 만든 우리 차의 치명적인 매력포인트, 그냥 안고 살아가자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서진 바닥을 잡아주는 끈의 틈 때문에 앞 범퍼가 열려
계속 경고음이 났다.
남편이 항상 안전벨트를 일찍 풀어서 났던 그 듣기 거북한 소리를
지금은 내가 친 사고 때문에 울려대는 것이기에 조용히 참고 가야 했다.
부서진 차를 빈티지 스타일로 몰고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경고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사람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차를 맡겨야 해서 차 안을 정리했다.
아마 이 일이 없었다면 평생 정리 안 했을지도 모른다.
차 안에 얼마나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많은지 한 박스가 나왔다.
그걸 다 끄집어내서 버릴 건 버리는데
대체 왜 선글라스는 3개나 나오는 건지?
복수는 나의 것
차를 맡기러 갔더니 견적도 안 봐주고 한 달 뒤에 오라고 했다.
지금 부품조달이 딸려서 중고차 시장도 그렇고
고치는 업계도 인력난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날의 내 자살골이 내 모든 일상을 뒤흔들어 놨다.
오랜 기간 기동성이 떨어지면서 내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운전 시작 후 3년 안에 사고가 나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그 말로 혼자 계속 위로를 했다.
이만한 게 다행이고 운전 백신 맞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괜찮아졌다.
그런데 이 어이없는 사건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깨달음도 있다.
남편의 위기 대처능력과 맥 가이버스러움을 알게 되고
무탈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쌩돈 날아가는 아픔을 알게 되고
도서관을 걸어 다니면서 차 타고 다닐 때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다.
가장 큰 수확은 이 바보 같은 사고 후 남편과 내편의 리액션 차이이다.
모두가 “그만하길 다행이야.” 했고
남편은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라고 했다.
이 부분이다.
이 안 닦고 자려고 온갖 핑계 대는 이 인간한테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진짜 쭈구리가 된 것 같았다. 이 치욕스러움을 어떻게 되갚지?
그때 진짜 남편을 왜 남편이라 부르는지 알게 됐다.
내편인 아빠는 “많이 놀랐겠네.”라고 했다.
아마 그 순간이 인생을 통틀어 아빠에게서 가장 크게 위로받은 순간이었을 거다.
남편이 하는 말“그러면서 배우는 거야.”와
아빠가 하는 말“많이 놀랐겠네” 의 천지차이가 실감됐다.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100만 원에 차를 고쳤다.
2주 만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는데 절대 예전의 마음이 아니었다.
내가 바보짓을 했다는 자국, 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나는 더 오버해서 조심스러워졌고 약간은 두려워지기도 했다.
내가 또 병신같이 자살골을 넣을까 봐 무섭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처음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나니까 괜히 더 긴장이 됐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분명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차를 망가뜨리고, 마음을 졸이고, 고친 차를 받아 드는 순간
그제야 이런 게 행복이구나 라는 실감 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더 이상 나는 바랄 게 없었다.
늘 항상 제자리에 있었기에 몰랐는데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것이 진짜 행복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차가 망가진 것처럼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내게 남았다.
남편에게 사고 쳤다고 이실직고했던 순간
“다친 데는 없어?”라고 걱정할 줄 알았는데 그 순간 3초의 마가 떴다.
그 분노의 정적을 평생 잊을 수 없고
나는 살아가는 내내 이걸 기억해두고 호시탐탐 복수할 타이밍을 엿볼 것이다.
'니가 자살골 넣은 사람의 심정을 알아?'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확은 아빠의 포근한 위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보다 뒤끝 있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