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꾸와 노빠꾸 사이
포틀랜드 개그 뒤에 생긴 큰 구멍
딱딱딱딱
뭔가로 싱크대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내 전용 에스프레소 머신 커피콩을 털어낼 때 소리와 같았다.
설마 남편이 그걸 청소하고 있다고? 기특하네
그런데 끝나야 할 시점에도 계속 소리가 났다.
‘뭐지? 드럽게 생색내네’
너무 시끄러워서 1층으로 내려가 봤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남편은 소파에 뒹굴며 유튜브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꾸 딱딱딱딱 소리가 나서”
“현진이가 2층에서 낸 소리 아니야?”
“아닌데 난 자다가 일어났는데”
남편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아 그거 딱따구리야.”
“뭐? 딱따구리가 있다고?”
어릴 때 디즈니 만화에서나 봤던 그 딱따구리가 그런 거란다.
살면서 딱따구리가 집을 두드리는 소리를 상상해 본 적 없다.
진짜 내 맨눈으로 보고 싶어 고개를 내밀었을 땐 딱따구리는 날아가고 없었다.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이브로 딱따구리 소리를 들었다.
내가 딱따구리를 진짜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지금 빠꾸와 노빠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니 포틀랜드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공기다.
깨끗하고 달달한 공기가 공짜다.
천장 높은 집은 내 인생의 여백을 만들어 줬다.
욕실 끝까지 쳐들어오는 햇빛은 더 이상 바랄 게 없게 만든다.
소비는 줄었지만 오히려 만족감은 더 커졌다.
여기선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나이키 운동화와 선크림 에코백이면 족하다.
인간관계는 단순해지고 자연 관계는 풍부해졌다.
사람이 아닌 자연과 동물과 우정을 쌓아가는 일.
계절의 미세한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지고 가까운 자연이 내 뮤즈가 됐다.
남친이 남편이 되었고
아무리 괴상망측한 일이 생겨도 그가 부리는 유머에 까맣게 잊는다.
“오빠는 탄산 들은 것만 좋아하잖아?”
“아니 난 현진이만 좋아하는데?”
“아 이래서 시엄마가 오빠 보고 지밖에 모른다고 하는구나.”
“아닌데 난 현진이 밖에 모르는데?”
“오빠는 이제 물고기 잡는 법을 알게 된 거야!”
“그래? 그럼 이제 현진이 잡는 법만 알면 되네?
나는 이걸 포틀랜드 개그라고 나는 부른다.
별것도 없는데 괜히 만족스러운 게 포틀랜드와 닮았다.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 이미 웃고 있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누리는 동안 나는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인간이 됐다.
지난 1년이 내 삶의 장르를 바꾸고 질을 높여주었지만 동시에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바로 내 일을 하면서 내 스스로가 나를 책임지고 먹여 살리는 감각이 없어진 것이다.
내 마음이 자꾸 빠꾸라 외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몰랐다.
남들보다 뒤처지지도 앞서 가지도 않는 그럭저럭의 성과를 얻었고
어떤 구간은 내 인생의 모든 운을 써버릴 정도로 큰 행운도 따랐다.
그런데 포틀랜드에 와서 가장 달라진 점은
내가 내 일을 사랑했고 아직도 그 일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됐다는 거다.
어쩌면 내가 이 하나의 사실을 깨닫기 위해 포틀랜드에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고 돌아 결국 내가 좋아하는 자리로 바람 쐬고 오기 위해 이 과정을 거친 건가?
서울에서 날아오는 메인작가 좀 구해달라는 피디의 연락에
‘어? 그거 내가 하고 싶은데’라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싱어게인>을 보면서도 자꾸 직업병 때문에 저거 개그맨 판으로 만들어도 재밌겠는데?
무명 개그맨이나 무대를 잃은 개그맨들은 지금 나오고 싶어 안달인데
어서 빨리 만들어 달라고! 를 외쳤다. 제목은 <코미디 어게인>!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예능 기획안을 선배 언니에게 다짜고짜 보내기도 했다.
<라스트 콘서트>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자신의 최애 가수가 몰래 찾아와 노래하는
콘셉트였다. 어차피 나는 못 만드니까 제발 구체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다.
어머나 내가 점점 미쳐가고 있는 건가 안 하던 짓을 하네?
그러고 있는 나 자신에게 경악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서로 “고생했어” “수고했어”라고 하는 말에서 멈췄다.
내가 여기서 계속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 인생에 저런 장면은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결혼과 동시에 난 동료들을 잃었다.
더 이상 같이 지지고 볶으며 나눌 이야깃거리가 없어졌다.
그 누구보다 저런 순간을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사람이 싫다면서 회식자리에 있는 자체를 두려워하는 인간인 주제에
정작 정말 그리운 것이 동료들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또 생각지도 못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 실감이었다.
도서관에서 혼자 글을 쓰는 편이 더 나와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고요한 도서관이 아니라 내가 원한 건 지지고 볶는 현장이었다.
나는 서로가 주는 시너지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상상 못 했던 일을 벌이는 걸 좋아했다.
그건 나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마흔 넘어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배워선 더욱더 불투명한 일이었다. (그건 모세의 기적급이다)
아직 내 안에 예능의 피가 절절 끓고 있음을 계속 무시할 순 없다.
세상을 다 속인데도 나 자신을 속일 순 없다.
내가 다시 돌아간다면 다들
“그래 니가 좋아하는 그 일탈이 이제 끝났나 보지?” 이 정도 관심으로 날 환영할 것 같다.
그 아무리 자연이 좋고 평화가 좋고 햇살이 좋고 남편의 유치한 유머가 다 좋다지만
현장을 누빌 때만 차오르는 그 살아있는 짜릿함이 내내 그리웠다.
여기서 나는 조금 더 진지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잃을 것, 아니 다시 내가 싸워야 하는 목록을 적어봤다.
-우선 남편과의 무한대 뽀뽀 ( 미뤄뒀다 한꺼번에 하지 뭐)
-윗집 오줌 소리까지 들리는 층간소음(이건 정말 견디기 힘들다)과 미세먼지
그러나 내가 다시 되찾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내 이름 앞에 남는 커리어와 존재감
(내가 왜 이렇게 존재감에 집착하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내가 외동이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 같다.
둘째 k장녀라는 포지션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의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주체성
-서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빠르기와 효율성
그래 난, 죽고 싶다면서 홍삼을 챙겨 먹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계절 부부로 살아가고 싶어
이일에 대해서 누군가와 고민을 상담해보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이다.
계절 부부로 지내면서 계절마다 만나 거나하게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싶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걸 알게 되었다.(유머 수준 동급의 티키타카가 주는 즐거움)
커리어를 쌓아야 행복한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정주부란 한 가정을 경영하는 CEO지만 나와는 맞지 않았다.
그들은 봄맞이 대청소를 인생의 큰 이벤트로 여겼지만 나는 아니었다.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또 그런 삶이 어울리는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게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형태의 부부생활이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기분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이 지금 펼쳐지고 있다.
그래 우리 계절 부부로 살아가자!
그 말을 하기 위해 내겐 상징적인 장소가 필요했다.
바다가 좋을지 호수가 좋을지 강이 좋을지 헷갈렸다.
출발 직전까지 망설였다.
남편의 도발 없이 단 한 번에 깨끗한 협상을 이끌어내기엔 아무래도 여기가 좋을듯했다.
지난번 살짝 간을 봤을 때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청학동 할배 같은 소리를 해서
조금 걱정은 되었다.
만약 또 그런 헛소리를 할 때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부부의 예시로
응수할 생각이었다. (남편은 미국 사는 교포이지만 한국에서 자기 커리어를 쌓는 여성들은
생각보다 많다. 안영미나 박은지 등등 다 연예인이지만)
그 바다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 바다로 가자.”
가는 길은 계절이 바뀌어 나무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가끔 가는 코스이지만 내 운전이 늘었는지 지난번보다 힘겹지 않았다.
익숙해졌다는 걸 먼저 내 몸이 알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편안함이 존재했다.
앞으로 어디에 익숙해질지 그건 내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드론도 날리고 햄버거도 먹었다.
나의 계획을 발표하기엔 탄수화물 섭취 직후인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같았다.
커피를 내리려고 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어쩔 수 없이 모래로 엉겨 붙은 짐들을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도는데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 커다란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걸 잡느라 뛰어다녔다.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대책 없이 해맑게 무언가로 달려들었던 어린 시절 내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비눗방울이 날 다시 유치원 시절로 데려갔다.
그 풍경을 보고 내 안에 뭔가가 꿈틀댔다.
“오빠 나 저거 하고 싶어! 다음에 긴 막대기에 줄을 달아서 만들어 오자 “
나는 궁서체의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저거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어, 비눗방울 아티스트,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남편은 또 저러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저 말을 너무 남발했기 때문이다. 도자기도 일러스트도 사진을 두고도 여러 번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마음의 일렁임의 결이 다르다는 걸 알아봐 주길 바랬다.
생존을 위한 밥벌이만이 아닌 내게는 낭만이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저 기술을 익혀 세계 곳곳 도시별로 가서 내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거야’
마흔 넘어도 설레는 꿈이 생기네!
그건 분명 내 마음이 시키는 일, 세상이 밝아지는 일,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었다.
비눗방울은 만들어질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계속 달라지는 바람의 크기나 방향으로 전혀 새로운 게 탄생했다.
그 바뀌는 모양만큼이나 아이들의 표정, 손을 뻗는 높이, 점프의 힘차기가 달라졌다.
그거야 말로 정말 예술이었다.
‘그래 빠꾸가 아니라 일단은 노빠꾸다.‘
오늘 이 비눗방울을 보여주려고 신이 날 바다로 이끌었나 보다.
어쩌면 빠꾸와 노빠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건
이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엎치락뒤치락할 테고
그건 이방인이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바다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거다.
미래를 도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엔 딱 좋은 장소가 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치밀하게 계획한 계절 부부 제안 브리핑을 다급하게 넣어두었다.
포틀랜드에 왜 왔지?
경험하러 왔다.
무엇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니 환장하는지 알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