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엄마가 잠시 후에 집에 온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은 기분을 서술하시오!
‘진짜 죽고 싶다. 관에 누우면 이런 거 안 겪어도 되잖아.’
이런 감정이 드는 나 자신이 괴롭고 정말 쓰레기 같다.
결혼 전 친구들에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엄마라면 막 잘해주고 싶고 그렇지 않아? “
라며 막말을 했다. 미쳤다.
인간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로봇 같은 말을 했었다.
“오기 전날 연락을 주시면 안 된다니?
근데 너네 시엄마는 왜 자꾸 오는 거야? “
적어도 오기 전날엔 연락을 주는 시어머니를 둔 친구가 날 위로했다.
친구와의 카톡은 나를 달래기 위한 안전장치였지만
괜히 나의 셀프 욕을 한 거 같아 찝찝하고 죄짓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친구와의 대화에 시엄마가 등장하지 않길 바랬다.
마마보이 처단식
친구 말고도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시엄마의 분량은 계속 늘어났다.
“오빠가 마마보이라서 나 너무 힘들어, 엄마로부터 독립할 순 없는 거야?”
남편은 내 말에 충격받더니 자기는 절대 마마보이가 아니란다.
자기는 와이프 보이라면서 아니 이제는 슈퍼보이가 될 거란다.
그가 마마보이라는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엄마 4월에 한국 나간데.”
“그래? 나도 4월 지나고 나간다고 말씀드려.”
“에이 그러면 싫어하지.”
“무슨 말이야?”
“현진이 한국 나가는 거 엄마가 안 좋아하지.”
애초에 내가 한국에 나가고 말고에 대해 타인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없다.
그런데 저 말이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압축한 말임은 확실했다.
저 말은 분명 언어폭력이었다.
더 문제인 건 남편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거다.
영주권 나오면 한국 가서 실컷 지내다 오라고 그래 놓고
자기 엄마가 싫어한다며 태도를 바꾸는 그런 개뼈다귀 머저리가 내 남편이라니!
온몸이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마마보이의 언어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어!’
미국 약혼자 비자를 위한 안내서에는 배우자가 폭력을 행사하면
언제든지 신고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그 폭력이 물리적인 폭력 말고 언어적인 거라면?
왜 언어폭력에 대한 건 없지?
미국 이민국은 이 시대적 요구를 적극 수용해서 개선하길 바란다.
윌 스미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것 이전에
그 역시 언어적 폭력을 당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여기서 의미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마보이 앞에
코리아를 뜻하는 k라는 말이 붙어야 할 거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남편은 k마마보이다.
미국에서 가볍게 농담으로 쓰는 그 마마보이가 아니라
이건 교포사회에서 성행하는 고질병이다.
정서와 문화가 그들이 이민 온 시기 90년대에 머물러 있어 벌어지는 괴상한 현상이다.
교포와 한국에서 온 배우자,
왜 이런 형식의 결혼생활 80프로가 해체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역시 숫자가 현상을 증명한다. 그 악의 축은 바로 k마마보이의 폭언 일게 뻔하다.
이 k마마보이를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 작전이 필요했다.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
내게 좋은 힌트를 준건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이 책이야 말로 지금 엉망진창인 나 자신이 반영되어 있었다.
저자 룰루 밀러 역시 혼돈, 무력감, 고립감으로 고통받지만 책 마지막에는 자유로워진다.
처음엔 물고기는 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하고 궁금했다.
어류라는 범주가 모든 미묘한 차이를 덮어 버리고 있다고 했다.
'내겐 사회가 정해 놓은 범주 따윈 필요 없어' 하듯이 저자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에 밑줄을 그으며 언젠가 나도 경험할 감정임을 예감했다.
그 용기의 원천은 자기가 좋아하는 과학 스타 조던의 덕질에서 뿜어 올린 에너지였다.
한땐 철이 없었던지 시엄마와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야말로 그건 판타지다. 시엄마라는 단어 자체가 판타지다.
거기엔 ‘잘 지내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이 이미 탑재되어 있다.
어류라는 범주가 모든 차이를 덮어 버렸듯
시엄마라는 범주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덮어 버린다.
시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냐와 상관없이 그냥 그 이름이 붙으면 싫은 거다.
그 존재를 표현하기엔 시엄마라는 말은 한없이 편협하고 내 언어가 부족하다.
내가 의지할 문장은 내손으로 고른다
k마마보이 처단식은 아직 하지 못했다.
그런데 '굳이 그것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 고민이 되는 일이 생겼다.
어제 아주 놀라운 장면을 봤다.
처음엔 놀라웠는데 뒤돌아보니 너무 치욕스럽다.
보통 친구와 사소한 일까지도 잘 공유하지만 이건 너무 굴욕적이어서 입이 안 떨어졌다.
내 앞에서 남편이랑 시엄마가 둘이 소리 지르면서 싸웠다.
순간 투명인간이 됐고 나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았다.
남편이 내 안식처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지옥이 있었다.
그 폭력적인 말들을 녹음해서 나중에 들려줄까 하다가 참았다.
'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일까?'
그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들이 사람 같지 않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수치심을 느끼는 전두엽이라는 게 있다.
나중에 이 생활에 무뎌져 이 둘이 싸우는 소리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BGM으로 여기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우리 아빠랑 싸울 일도 없지만 행여 그럴 일이 있다 쳐도
우리 아빠는 사위을 앞에 두고 그런 폭언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내 앞에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절대 그런 행동은 못한다.
k마마보이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공수표를 날렸다.
하지만 그의 알량한 다짐보다 내가 더 믿을 수 있는 건 책 속의 문장이었다.
나는 오바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상대가 비열하게 굴더라도
끝까지 품위를 지키는 정서적 주도권을 가져라 " 고 읊었다.
그건 나 자신에게도 똑똑히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종종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남편을 통해 하고는 한다.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럴 수가 있어? 내가 투명인간이야?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냐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책은 이런 수치스러운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번에 겪은 치욕은 역대급이다.
아직 그걸 덮어줄 문장을 찾지 못했다.
치욕의 강도는 날마다 더 거세어지지만
역시 내가 의지할 문장은 내 손으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어디 있니? 나는 오늘도 흥청망청 새 책을 사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