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잘 된 일
메타포는 전염된다
싱그러운 짓이 뭘까?
아침에 집어 든 레이먼드 카버 시집을 읽다가 그 단어에 꽂혀 버렸다.
오늘 나는 싱그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급하게 남편에게 호수에 놀러 가자고 졸랐다.
후다닥 짐을 챙겨 싱그러운 짓을 하러 출발했다.
“그러니까 도박하는 아빠를 둬서 참 다행이야.”
우리는 차 안에서 남편이 미국에 오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아빠가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미국에 오지도 않았고 복도에서 뛰었다고 뺨맞는 한국학교를 계속 다녔을 거다.
그런데 도박을 한 아빠 덕분에 선생이 뺨을 때리면 잡혀가는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엔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지만
지나고 보니 k가정이라면 있을 수 있는 역사의 한 대목이다.
“그럴 수 있지!”
아빠의 도박, 빈털터리로 미국에 와서 개고생을 한 클리셰.
“그런데 난 이 이야기를 숨기고 부끄러워하기보다
그 역경을 이겨낸 힘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고 봐!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된 거잖아! “
역설적으로 아빠 때문에 군대를 못 간 건 아쉬워한다.
“국방부에 마흔 넘어도 군대 받아주라고 청원 넣어줘?”
그는 군대 덕후로 <진짜 사나이>등의 군대 예능을 즐겨본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라며 동태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날 때면
자연스러운 군입대를 방해한 그의 아빠가 원망스럽긴 하다.
“그래도 아버님이 큰일 하셨어
오빠네 가족 스토리의 가장 큰 훅은 바로 아빠야. “
그 이야기를 하며 호수로 향하는데 이 이야기의 메타포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 된 일!
어떤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면 그 메타포가 내 인생에 전염되는 것 같다.
컵라면 맛집을 발견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눈산이 보이는 트릴리움 호수에 가려고 나섰다.
그런데 거의 다 도착했을쯤 진입로가 막혀있었다.
설마 길이 막혀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싱그러운 짓을 하러 집을 나섰는데 싱그럽기는커녕 차에서 썩다가 갈 위기였다.
호수엔 캠핑장이 함께 있는데 아마도 여름이 되면 개방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걸 알리가 없는 우리들과 우리들 비슷한 처지의 차들은 주차장에서 방황했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워 발을 동동거렸다.
어쩔 수 없이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근처에 있는 스키장으로 갔다.
지난번에 한번 갔었기에 기대감은 덜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차선이었다.
그런데 지난번과 입구가 조금 달랐다.
들어가는 길에 리프트가 있고 거짓말처럼 멈춰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놀이공원을 통으로 전세 낸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시즌이 끝난 텅 빈 스키장, 거기엔 정말 그야말로 야생이 살아 숨 쉬는 눈산이 있었다.
손을 내밀면 그 산이 만져질 거 같이 생생한데 전혀 춥지 않았다.
시원한 눈 때문에 숨 쉬는 것도 상쾌했다.
수술할 때 코에 끼고 있는 산소호흡기처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눈산미스트, 이거 담아서 가지고 가고 싶었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햇빛은 따뜻하다.
천국인가? 천국에 가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마침 챙겨 온 신라면 컵라면이 있었다.
어디서 본건 많아서 스위스 융프라우에 가면 불티나게 팔린다는 그 라면을 꺼내
그 분위기를 내 보았다.
가끔 컵라면은 어디서 먹는 게 가장 맛있는가 순위를 매기곤 한다.
어지간해서 맛없기 힘든 이 컵라면의 베스트 장소란 눈 내린 산이다. 여기에 한국인의 오랜벗 믹스커피와 초코파이로 마무리하면 컵라면풀코스가 완성된다.
벚꽃이 내리면 아이스크림 산에 가야지
포틀랜드는 랜드마크 하나 없이 마케팅이 잘 된 도시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포틀랜드의 랜드마크는 눈산이다. 우리가 아이스크림 산이라 부르는 이 산 말이다.
4월, 벌써 벚꽃이 지고 있는 이 시즌에 생크림처럼 싱그러운 눈이라니!
다만 도쿄타워나 에펠탑과 다른 건 날씨에 따라 행운이 따라야만 볼 수 있다는 거다.
도쿄에 살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면 도쿄타워를 보러 갔듯이
여기서 뭔가 마음이 콱 막힐 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이 산을 찾아 위안을 얻는 것 같다.
이 웅장한 눈산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지금 못할게 없다.
“우리 매년 벚꽃이 질 때 여기 와서 봄눈을 보자!”
산꼭대기라 그런지 기압 때문에 가져온 커피 믹스가 뚱뚱보가 되었다.
팽팽하게 터지기 직전의 믹스커피를 뜨거운 물에 부었다.
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오늘 신이 우릴 여기로 보내려고
아침부터 그 시집을 읽게 하고 호수 길을 막아 놨구나 ‘ 싶었다.
간판 없는 맛 집이 유행이라던데 진짜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그런 곳 같았다.
여행 책에도 나오지 않는 그런 소중한 곳을 우연히 알게 된 기쁨!
그야말로 ‘싱그러운 짓’이다.
오늘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가려던 곳이 막혀 더 좋은 곳으로 가버렸다.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잘된 일,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타포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 계속 일어났으면 하는 메타포다.
이제 길이 막힐지라도 한편으론 설레게 된다.
외로워지는데도 요상하게도 용기를 얻고야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