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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Apr 19. 2022

흐물어진 바나나가 된 날엔 케이크를 구울까 해

케이크 굽는 사람이 되다

“어머 대단하다 집에서 케이크를 다 만들고.” 친구의 말에

레시피 대로 해도 망치는 인간이 나란다.” 얼버무린다.

베이킹을 동경했지만 막상 그걸 해볼 용기는 없었다.

케이크를 굽는 일은 내겐 너무 거창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케이크를 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막상 구워놓으면 먹지도 않으면서 나는 왜 케이크를 굽는 걸까?


어젯밤, 집으로 오는 길에 역주행하던 차가 나를 덮칠 뻔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라 옆에 남편이 타고 있었다.

그 아찔한 순식간을 목격한 동지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제대로 나눌 친구들은 다른 시차에 있다.

각자 자기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게 엇갈리는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방인의 마음엔 해소되지 않는 서러움과 울분이 찰랑찰랑 차오른다.

그게 쏟아져 나오는 날, 그런 날마다 케이크를 구웠다.


케이크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단 한 번도 케이크에 성공해본 적 없지만

이걸 계속하는 이유는 망하면 망하는 대로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케이크를 굽는 의외의 재미는 맛도 아니고 뿌듯함도 아닌

'나를 알아가는 재미'다.

마흔 넘어 보니 이제 대충 나 자신에 대해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새로 알아갈 게 있다는 걸 케이크를 구우며 실감한다.

케이크를 굽는 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같다.

태어날 때부터 예정일을 넘겨 유도 분만제를 맞고 태어난 나는

가족들에게 천하태평 유유자적 캐릭터로 통한다.

그건 가족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케이크를 굽고 나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건 다르다.


생애 처음 얼그레이 케이크를 만들던 날

집안 가득한 고소 하면서 쌉싸름한 냄새에 취해버렸다.

분명히 유튜브에서 케이크를 냉장고에 5시간 식힌 후에 아이싱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난 그 긴 시간을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 기다림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무모하게 생략했다.

그걸 건너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궁금했다.

성급하게 냉동실에 넣어 열기만 식힌 후 크림을 입혔다.

건축이라면 이런 게 바로 부실공사가 아닐까?

그때 알았다. 궁금해서 미치면 모든 절차를 건너뛰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인간이 나란 걸.

케이크 하나 제대로 못 구울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는 걸.

세상엔 이미 많은 편견이 있고 그 편견이 깨질 때의 쾌감이 있다.

그게 나 자신에 대한 편견이라면 정말 데미안에 나오는 껍질을 깨고 태어나는 느낌이다.

성격이 급한 데다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걸 못한다.

중간에 호기심이 생기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딴 길로 새어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생각보다 케이크의 두께는 얇게 나왔고 식히지 않는 빵 위에 크림을 얹혔더니 볼품없었다.

볼륨감 있는 크림이 케이크의 비주얼을 압도해야 하는데 망했다.

겉멋이 중요한 나는 다급해졌다.

나의 구세주를 찾기 위해 재빨리 냉장고를 뒤졌다.

굴러다니는 라즈베리를 양쪽 끝에 올렸더니 그야말로 ‘있어빌리티’가 완성되었다.

실상은 망했지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는 성공했다.


망해도 계속 케이크를 굽는 이유

이번엔 밥솥 치즈케이크를 구웠다.

쓰지 않고 처박아 둔 유물 쿠쿠 전기밥솥을 꺼냈다.

남편이 아마존에서 론칭할 때 기념으로 사둔 거라 했는데

내가 케이크를 굽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처박아 둘 뻔했다.

레시피를 따라 하다 기절할 뻔했다.

이렇게 설탕이 많이 들어간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레시피를 의심했다.

치즈케이크가 품는 설탕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치즈케익  먹다가 사람이 설탕이 될 것 같았다.

밥솥 세팅을 하는 데 사용법이 너무 어려웠다.

생긴 건 밥솥인데 용도를 보면

빵 굽기, 쌀죽, 멀티쿡 등 20가지가 넘는 만능 요리사였다.

이리저리 눌러보며 쩔쩔매는데 시간을 다 썼다.

쿠쿠 밥솥은 상전이었고 내가 모셔야만 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그냥 코드를 빼버렸다.

헤매던 곳에서 빠져나와 다시 밥솥을 세팅했다.

완성된 케이크 밑을 빨리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식히지도 않고 뒤집어 올렸다.

캐러멜 컬러로 나와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나왔을지 그게 너무 궁금했던 거다.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걸 기다리는 것 까지가 베이킹인데

이번에도 나는 그 기다림에 실패했다.

당장 갖고 싶은 인형을 계산대에 잠시 올려놓는 걸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바코드를 찍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걸 못 기다려 울고불고 난리 치는 바보.

이걸 오롯이 잘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참는지 궁금하다.

너무 뜨거운 케이크를 옮기자 모양도 잡히지 않은 채로 한쪽이 흘러내려버렸다.

그런데 변태처럼 그 망한 걸 보는 순간이 의외로 상쾌했다.

그걸 되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 내는 순간은 더 상쾌했다.

망한 치즈케이크에 스노우파우더를 뿌렸다.

그러고 보니 난 '망한 걸 망한 대로 그걸 순발력 있게 살리기'를 잘하네?

어쩌면 이게 내가 사랑했던 일이다.

예능국 현장은 언제나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선 ‘죽은 사람 살리는 일’ 빼곤 다 하던 곳이었다.

그 감각이 그리 줬던 거다.

그래서 케이크를 만들어 놓고 먹는 거보다 그 감각을 기록하는 게 즐거웠다.

흐물어진 바나나가 되는 날엔 케이크를 구울까 해

케이크 한판을 오롯이 구울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망했어도 끝까지 케이크가 되게 책임지고

종종거리고 있는 순간을 좋아하게 됐다.

그 망함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좋아하게 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면 안 되는 거야

망한걸 충분히 끌어안은 채로 나아가는 거야 ‘


책에서 본 회복탄력성이란 게 이런 걸까?

흐물어진 바나나도 근사한 바나나 케이크로 변해버리는 케이크의 세계.

그건 이케아 책장을 잘못 조립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잘못 구멍 난 판은 다시 재조립이 불가능했다.

망쳐도 얼마든지 되살리기가 가능한 케이크의 세계를 사랑하게 됐다.

케이크는 언제나 망했고 이유는 확실했다.

‘기다리는 일’ 그걸 못해서.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잘 기다리는 일’ 같다.

다음 케이크를 만들 땐 ‘기다리는 일’을 충실히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걸 뛰어넘으면 내게 어떤 결과가 오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갑자기 엄마가 그릇 정리를 하면' 뭔가 속 답답한 게 있는가 보다' 하는 클리셰처럼

내가 케이크를 구우면 그런 거다.

지금 나는 흐물어진 바나나가 되었고

근사한 케이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거다.

그런데 들키긴 싫다.

그냥 케이크가 먹고 싶은가 보네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도 괜찮을 거 같다.

케이크 앞에선 요상하게 설레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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