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마이너스
서울 빠르기 vs 포틀랜드 리듬
파이브 가이즈에 처음 간 날이다.
집 근처라서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1년이 지나도 가보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바로 난 코앞에 있는 공원보다
일부러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공원을 더 많이 간다.
왜 나란 인간은 가까이 있는 걸 잘 활용하지 못할까?
항상 왜 멀리 있는 걸 동경해 버려서 피곤하게 사는 걸까?
왜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보지 못해?
남이 가진 걸 더 갖고 싶어 안달일까?
미국엔 3대 버거라는 게 있는 모양인데
쉑쉑, 인 앤 아웃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파이브 가이즈였다.
왜 이름이 5명들이지? 궁금했다.
처음엔 아버지와 네 아들이 만든 버거 가게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고 나서 늦둥이가 생겼단다.
지금은 아버지 대신 그야말로 다섯 명의 형제가 주인공이 됐다.
나처럼 처음 와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가 이미 단골처럼 여유롭게 주문했다.
내 차례가 되어서 밀크셰이크와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돌아서려는 찰나 아르바이트생이 나에게 토핑을 고르라고 했다.
‘아니 난 치즈버거를 주문했는데 그럼 알아서 만들어 주는 거 아니었어?’
알고 보니 서브웨이처럼 내용물은 자유롭게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장학퀴즈에 나간 것처럼 재빨리 토마토와 양파라 대답했다.
그 외에도 메뉴판엔 개미처럼 작은 글씨로 뭔가가 잔뜩 쓰여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날 쪼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날 쪼고 있었다.
서울 빠르기의 강박이 아직 몸에 묻어있다.
포틀랜드의 리듬으로 느긋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볼 줄 모른다.
신용카드가 승인이 떨어지기 직전의 그 몇 초를 못 참아 카드에 손이 가고야 마는
나를 보고 알바생이 한국 사람이냐고 놀렸다.
소스 없는 햄버거를 먹다가 든 생각
나중에 유튜브를 보니 그 버거집의 별미는 공짜 땅콩이었다.
공짜라면 뽕을 뽑아야 한다며 또 한가득 집어왔겠지만
처음 가본 버거 집에서 당황한 인간은 그런 걸 즐길 여유가 없었다.
들어갈 땐 공짜 땅콩에 열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버거 집을 나올 땐 그런 것에 손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햄버거 첫 입을 먹는데 뭔가 밍밍했다.
오랫동안 고대해온 나의 길티 플레져 탄수화물 대잔치 점심이 이런 식으로 망하다니!
알고 보니 토핑을 고를 때 소스까지 고르는 거였다.
한입을 더 먹다가 고민했다.
다시 가서 소스를 뿌려달라고 부탁할까 말까?
얼마 전 읽은 책 <어른의 재미>에서 승마를 배우다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바로 올라타야 한다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그러지 않으면 두려움에 평생 못하게 된다고.
그 내용이 떠올랐다.
역으로 나중에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선
소스 없이 맛없는 이 햄버거를 온전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뼈저린 아픔을 겪어야 나중엔 이런 실수를 안 할 거 같았다.
지금 바로 고쳐버리면 금방 잊어버릴 거 같아서 오답노트를 만들 듯
내 실수를 음미하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스의 존재보다 부재가 좋았다.
이거 생각보다 신선한데?
가끔 초밥 롤을 먹을 때 소스가 범벅돼서 고유한 연어의 맛을 빼앗겨 버린다.
소스 없이 먹으니 그동안 몰랐던 재료 각각의 본연의 맛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현대인들은 너무 복잡하게 먹기 시작했다.
후렌치 프라이를 먹을 때 항상 케첩에 찍어 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케첩 없이 먹는 사람이다. 나도 한번 따라 해 봤다.
굳이 케첩 없이도 오로지 소금과 감자만의 조합이 깔끔했다.
케첩이 이 맛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 시점부터 빵 취향도 서서히 변했다.
다른 화려한 크림 같은 것에 가려서 진짜 빵의 식감을 즐길 수 없는 빵 말고
소금 빵처럼 심플한 게 좋아졌다.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더 설레어
얼마 전 새 운동복을 살 때보다
오래돼서 작아진, (정확히는 살쪄서 작아진) 운동복을 버렸을 때 기분이 더 새로워졌다.
마이너스가 내게 큰 설렘이 된 구체적인 순간이다.
이제 플러스보다 지속 가능한 마이너스를 추구하고 싶다.
무엇을 더할까 보다 무엇을 뺄까를 생각한다.
그 분별이 내게 생긴 것이다.
지속 가능한 마이너스를 실행해 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인생에서 뺄 수 있는 것 , 빼고 나면 더 쾌적해지는 것
1. 공기청정기 : 거실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이 기계는 사실 서울이면 몰라도 포틀랜드에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터 교체의 노예로 살아왔다.
치워버리자.
2. 수영복 탈수기 : 일정 기간 이게 고장 나서 그냥 내손으로 샤워 끝에 꾹 짜내야 했다.
탈수기가 돌아갈 때 듣기 싫은 굉음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은근히 악력도 길러져 뿌듯하다.
3. 해피아워 맥주 : 1불이라는 치명적인 매력의 가격 때문에 어영부영 습관처럼 마셨다.
왠지 안 마시면 손해 보는 것 같은 심정으로 마케팅 호구가 되곤 했다.
해피아워란 그 시간대가 3-5시이기에 그걸 마시면 찰랑찰랑 잔잔히 취해서 요상하게도 하루를 망치곤 했다. 더 이상 1불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마실 거면 당당히 모든 금액을 지불한 후 내가 원하는 밤 시간에 마시기로 했다.
지속 가능한 마이너스
생각해보니 아빠와 가는 단골집 <초원복국> 에선
밑반찬으로 복어튀김이 나오는데 아빠는 늘 그걸 빼고 달라고 한다.
튀김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걸 포기하는 거지?
이미 아빠를 통해 간접적으로 겪은 지속 가능한 마이너스였다.
이따가 통화할 때 한번 물어봐야겠다.
몸에 안 좋아서 빼는 건지? 설마 먹기 싫어서 빼는 건지?
그걸 빼게 만든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의외의 포인트에서 터졌다.
아빠는 자기에게 구체적인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자체에 너무 반가워했다.
밥 먹었냐는 모두가 던지는 상투적인 질문 말고 나니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신이 나서 어떻게 이런 걸 물어볼 생각을 다했냐고 내게 물었다.
소스 없는 햄버거 먹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아빠는 복어튀김을 너무 사랑하지만
기름을 여러 번 사용하기 때문에 산화된 게 몸에 안 좋아서 포기한 거라고 했다.
나름대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자기 인생에서 치워버린 것 같다.
그러면서 호떡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호떡은 그때그때 마가린이나 버터를 쓰기에 괜찮다고 했다. 나는 마가린이 산화된 기름만큼 안좋다고 응수했고 아빠는 믿고싶지 않아 했다.
호떡을 변호하는 아빠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여기서 호떡은 엄마가 몸에 안 좋다고 못 먹게 했던 길거리 음식의 대표다.
지나가다 호떡이 있으면 아빠는 하트를 뿜으며 그 앞을 서성거렸고
엄마는 레이저 나오는 눈빛으로 아빠를 저지했다.
호떡에 대한 무언의 탄압, 그 풍경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지만
아빠는 호떡을 사 먹으면 왠지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아 아직도 안 먹는 것 같다.
그런데 인생에 호떡까지 빼면 무슨 재미야?
아빠는 한국에 오면 코로나 걸리니까 천천히 오라고 했다.
나도 그래야겠다고 끄덕끄덕 했지만 이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오빠 나 한국 가는 비행기 끊어야겠어! 빨리 가서 호떡 굽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