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환불원정대가 되긴 싫어

나이키 운동화 -> 예티

by 보리차

“포틀랜드 라구요?”

커피와 맥주로 유명해진 그곳은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미지의 도시였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기사식당에서 한 남자와 김치찌개를 먹게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포틀랜드에 자주 들락날락거리게 됐다.

그가 내게 선물했던 첫 번째 책이 ‘어디서 살 것인가’였고

두 번째 책이‘포틀랜드(매거진 B)’였다.

질문 뒤에 답을 줬다. 그 연결이 귀여웠다.

우리는 사랑을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내 커리어와 작별해야 했다.


내 결혼 결심을 처음으로 베프에게 말했을 때

“너 정말 일하기 싫었나 부다”이 말을 듣고서

뒤는 말잇못.

작년 겨울에 포틀랜드를 벼락치기로 2주 정도 훑은 적은 있다.

그땐 겨울이었고 해가 짧았다.

롱디 커플인 우리는 하루가 너무 아까워서

하루를 2부제처럼 쪼개 썼고 정말 미친놈들처럼 돌아다녔다.

그땐 여행자였지만 이번엔 생활자로 지내보기로 했다.

책에 나오는 핫 플레이스를 쫓아다니는 대신

스스로 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발견해 보기로 말이다.

그렇게 포틀랜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생활자로 살아 보니 정말 일상의 대부분을 쇼핑으로 보내고 있었다.

포틀랜드는 쇼핑 텍스가 없어서 물건도 싸고

그놈의 세일은 얼마나 자주 하던지.

그는 내 이름이 새겨진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내 이름은 차현진인데 카드에는 ‘현진 차 이’라고 되어있었다.

미국에선 결혼을 하면 남편 성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내 성을 남기려면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내 허락을 받지 않은 내 신용카드라는 게 이상했다.

신용카드 만드는 게 한국에선 얼마나 어려운데

미국에선 이게 그리도 쉬운 일이라니

좀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자신이 번 돈은 자신을 위해 쓰라고 했다.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엄마의 세계관이다.

엄마는 조선소에서 일했다.

그 당시 자신이 번 돈으로 좋아하는 옷들을 해 입었던 것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인생에서 그럴 수 있는 시절은 길지 않기에 마음껏 즐기라 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벌었고 열심히 나에게 썼다.


그가 준 카드로

한두 번은 제이 크루 가서 옷도 사고 세포라에서 화장품도 샀다.

그런데 왜 설레지 않지?

그 순간 깨달았다. 남이 준 돈으로 쇼핑하는 거 맛 대가리 없다.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일 때 쓰는 것도 신이가 난다.


그날도 우리는 재미없는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나이키 본사가 있는 포틀랜드는 나이키의 고향이기도 해서

아주 싼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다.

그의 옷장에는 이미 한평생을 입어도 충분한 나이키가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폭탄세일을 핑계 삼아 집에도 쌓여있는 나이키 러닝화를 또 사고 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순간 내 얼굴에서 소나기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니 스콜 수준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당황한 그는 “왜 그래? 오빠가 뭐 잘못했어?”

아니 당신의 잘못은 없다.

그날 샀던 게 맘에 안 들었던 것과 동시에

내 커리어 욕망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면서 사건은 터졌다.


그는 한 생명체가 갑자기 폭풍으로 울어대는 걸 처음 봤다고 한다.

아니 쇼핑하면서 갑자기 대성통곡하는 사람, 종종 있지 않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는 여자.

뒤에서 진심으로 나와의 결혼을 다시 생각해봤을 수도 있다.

당시엔 그에게 털어놓지 못한 말이 있다.

그때 설명을 하지 못 했던 건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어떤 감정 때문이다.

그간 쌓은 커리어에 화룡점정을 찍을 기회가 내가 왔는데, 거절해야만 했다.

그것에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었다.

결혼? 일? 둘을 구분해야 하는 내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저는 후배들이 한참은 직업을 가지고 글쓰기를 병행했으면 합니다.

자기 자리에서의 체험이 골방에서의 글쓰기 보다 낫습니다 <박완서>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그는 내 입장을 모른다.

프리랜서가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

마침에 그걸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큰 기회가 왔을 때의 벅찬 느낌을.

그렇게 때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차에서 주룩주룩 울고 있는 내 뒤로는

나이키 쇼핑백들이 와르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날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잠시 차를 세우고 커피를 사러 갔다.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리니 눈 앞에 홈리스들이 보였다.

포틀랜드 다운타운에는 유독 청년 거지들이 많다.

그들은 패션잡지에서 튀어나온 듯이 스타일리시하다.

심지어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며 소설을 읽어가며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다.

원 하는 시간에 낮잠을 자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구걸을 한다.

멀티플레이어의 달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통에 돈이 모이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그런 풍경들을 볼 때마다 힙스터의 도시가 아니라 루저들의 도시 같았다.

구걸로만 한 달에 300만 원 정도를 거뜬히 벌고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까지 받는다고 했다.

강아지 피플에겐 보조금 혜택이 더 넉넉하다고 한다.

“쟤네가 대기업 다니는 네 친구보다 더 많이 벌 수도 있어.”

아무 생각 없는 그 말에 너무 짜증이 났다.

난 대기업 다닐 능력도 안 되지만 그 말은 분명 내게 상처가 됐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얻는 그 성취의 달콤함을 왜 포기하고 사는 거지?

짜릿한 쾌감을 느낄 때에만 분비되는 호르몬 이름이 아드레날린이었나?

아무튼 그 이름이 뭐든 간에, 그게 을매나 재밌는데?

누군가와 손발을 맞춰가며 케미가 뿜어 나올 때, 그게 을매나 재밌는데?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 한 채

자기가 어디까지 가볼 수 있는지 해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돈을 구걸하고 있는 그 비겁함이 보기 싫었던 거다.

다른 사람이 쥐어주는 거랑 내가 벌어서 쓰는 건, 돈 맛이 다르다고 이것들아!

동시에 나 또한 그런 성취와 동떨어진 ‘현진 차 리’로 살아갈 앞이 캄캄했다.


나 자신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며 경단녀가 되는 슬픔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난 포틀랜드에 그를 만나러 왔지만

사실 진정한 나 자신과 독대를 했다.

나는 내 세계가 수렴되는 게 끔찍하다.

나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더 멀리 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내가 대성통곡할 때 그냥 가만히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너무 좋잖아! 라며 좋아하는 앞뒤 안 맞는 나란 인간!

어른들은 진짜 울 일이 있어서 우는 게 아니라

아기가 되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닐까?

살아있는 동안 울 일은 무궁무진할 텐데,

아기처럼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커리어만큼 중요하다.

(제가 많이 울어봐서 잘 알아요)


결혼해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왜 하필 미국 사는 인간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하냐고?

글쎄 지금은 나도 모르겠고 10년쯤 지나면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다음날 나이키 매장에 가서 어제 산 것들을 모조리 환불했다.

자꾸 환불원정대가 되는 건 습관적으로 사기 때문 아닐까?

애초에 날카로운 안목이 있다면 이런 고민도 필요 없다.

세일의 노예가 되어 당장 신지도 않은 걸 너무 많이 샀다.

앞으로 신을 운동화는 필요 없다.

지금 당장 신을 운동화만이 필요하다.

조금 닳고 틀어져 내 발에 꼭 맞는 운동화 만이 지금 내게 필요하다.


세일기간은 뭔가를 사서 싸게 샀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마치 그걸로 ‘대단한 절약을 했어’ 인증해야 하는 의무감.


이제 물건은 가격을 보지 말고 사자.

그게 물건을 향한 찐사랑이다.

쇼핑할 땐 뽀얀 백지 상태 깨끗한 마음으로 하자

싸다고 현혹되는 건 가짜다.

‘이 가격에도 불구라고’하는 것만이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환불원정대가 되긴 싫다.


우리는 그러고선 가까운 바다로 갔다.

거기엔 캠핑 온 가족들이 많았는데 거기서 ‘예티’를 처음 보았다.

예티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디자인 캠핑용품 회사다.

그때 본 아이스박스가 눈에 콱 박혀버려서 잊히지가 않았다.

첫눈에 반한 그 순간! '이거 대박인데?'라는 110볼트 전기가 내 몸에 흘렀다.

정말 갖고 싶어! 미국에서 진심으로 사고 싶어 안달 난 건 처음이었다.

가격마저, 함부로 살 수 없어 더 매력적이었다.

물론 세일 같은 것도 하지 않아 내 순수한 사랑은 더 불타 올랐다.

그런데 아직 당장은 캠핑 갈 일이 없어서 그걸로 예티 주식을 샀다.

비자 서류 과정이 끝나고 내 영주권이 나오는 날

주식을 팔아서 예티 지르러 가야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이스박스다.


동생이

“오빠 만나고부터 갑자기 쳐 우는 그거, 싹 없어져서 너무 좋다”

아니 아니, 네가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나는 종종 그러고 있었고

오빠는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단다.


오빠! 앞으로도 내가 앞뒤 두서없이 갑자기 울면

이젠 그만 놀라고 다음을 참고해 주길 바라.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김영민 교수 주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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