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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Aug 03. 2022

내가 개고생 하면서 선물을 사는 이유

이방인의 고국방문 선물 리스트

하마터면 또 홍삼을 선물할 뻔했다.

이민 후 첫 고국 방문을 앞두고 있다.

'설마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나오면 어떡하지?'

매일 그런 불안과 싸우는 중 이모님이 점심 먹자고 우릴 불렀다.

“아빠 골프 치시니? 골프공 사다 드려라.”

하면서 케리어를 골프 공으로 다 채울 만큼 거금을 주셨다.

‘골프 치는 사람에게 골프공을 선물하면 좋아하는 걸까?’

집에 먼지처럼 굴러다니는 골프공을 사갈 생각은 못했다.

내겐 언제나 집에 떨어질 리 없는 쌀처럼 느껴졌다.

내가 골프를 안치기 때문에 골프 피플이 골프공을 받을 때 마음을 알 리가 없다.

뜻밖의 이모의 제안 덕분에 아빠 선물이 해결되었다.

사실 아빠 선물로 뭘 사야 할지 품목을 고르는 건 어려운 고민이다.

웬만한 건 다 있고 해서 그간 홍삼으로 때우며 살았다.

더 이상 홍삼 사는 건 나도 이제 지겨웠다.

매장에 직접 가보니 신상 골프공이 있었다.

골프공이 거기서 거기지 신상이라는 게 있는 걸까? 싶었다.

골프공에 오돌토돌하게 난 홈을 '딤플'이라고 하는데

이 상처의 모양에 따라 공기의 저항을 줄여 더 잘 날아간다고 했다.

신상공은 딤플이 업그레이드돼서 더 멀리 날아간다고 했다.

이 공은 아빠의 홀인원 확률을 더 높여 줄 것이다.

이 새로운 공이 아빠의 골프 생활을 바꿔준다 생각하니 나 역시 설렜다.

최고의 선물이란 깜짝으로 '변화'를 주는 일 같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는 일

아빠 선물은 해결해서 좋았는데 동시에 큰 고민이 생겼다.

'이모는 뭘 사다 드려야 하지?'

이모가 용돈만 주신 게 아니라 마음을 주셨다.

"아빠 미국 오시면 좋은 골프장 내가 모시고 다닌다고 전해 드려라"

그 마음에 걸맞은 예우를 해드리기 위해 뭘 준비해야 할지 난감했다.

시엄마는 이모에 질세라 이모보다 더 큰 금액의 용돈을 주면서

친구 가족들 선물을 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쓱 힌트를 주셨다.

“이모는 올 때 기장에서 다시마랑 미역 사다 주면 좋아해”

시험문제를 미리 알게 된 사람처럼 마음이 평안해졌다.


사실 이번 한국 방문 목적이 병원 투어고 코로나가 기승이라

가족 이외에는 만남을 자제해야지 했다.

그래서 선물 사느라 이고 지고 하지 말고 만나면 그냥 밥 사줘야지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케리어 미어터지게 선물을 주섬주섬 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예전에야 미제가 싸고 좋았지

지금은 한국에 더 좋은 게 넘치고 간편하게 구매대행도 할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소중한 사람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기분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아빠의 골프공처럼 '변화'를 줄 수 있는 아이템부터 사들였다.

친구가 에어컨 세게 트는 남편 때문에 얼굴이 찢어질 거 같데서

캐나다 유기농 오일을 샀다.

방광염에 자주 걸리는 친구는 여성 유산균을 준비했다.

취향 확고한 사람들은 오히려 쉬웠다.

파타고니아 쟁이들은 파타고니아 바람막이를 샀고

와인을 좋아해 와인 동호회에서 남편을 만난 언니에겐 포틀랜드 와인을 준비했다.

여행 가면 비누만 사 오는 비누 컬렉터에겐 유기농 노니 비누를 샀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를 대비해 핸드크림이나 비타민을 여분으로 샀지만

역시 '아무나'를 위한 선물은 돈을 쓰면서도 재미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뭘 살지 머리를 쥐어짜고

곳곳을 싸돌아다니고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쓸 때 살아있는 것 같았다.


선물 고르기가 조카보다 더 어려운 사람

그런데 선물 고르는데 가장 어려운 사람이 나타났다.

뭘 사줘도 심드렁! 바로 나의 사랑 조카들이다.

내가 큰맘 먹고 사간 티셔츠가 맘에 안 든다고 바로 환불조치를 내렸을 때,

동시에 나도 선언했었다!

‘이제 평생 앞으로 너희 선물은 안 살 거야’

어릴 땐 그래도 리액션이 다양했는데 이젠 나도 지쳤다.

지치긴 개뿔! 그래 놓고 여전히 그들이 좋아하는 표정 하나 보겠다고 이 고생 중이다.

핏줄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 뭔 짓을 해도 그들 앞에선 무너져 버리는 나를 발견했다.

부족한 게 없이 자라서 그런지 뭘 사가도 이미 가지고 있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지엄마한테 쪼르르 말해서 바로바로 획득하는 그들이었다.

진짜 갖고 싶은 걸 드디어 갖게 됐을 때의 소중함을 모르는 너희들에게

도대체 난 뭘 사가야 하는 거니?

그런데 내 핏줄이 섞인 내 조카보다 더 어려운 어린이가 있다.

바로 내 친구 아들이다.

내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이 꼬마는 내 소개로 결혼한 친구의 아들이기에 각별하다.

조카들에겐 뽀뽀를 구걸하지만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내게 와서 뽀뽀를 해준 유일한 어린이다.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도 잘한 일 하나쯤은 있네’ 하고 뿌듯해진다.

6살 어린이가 뭘 좋아하는지 인터넷을 뒤졌다.

제발 영어 그림책 같은 걸 사는 실수는 하지 말라고 한다.

수많은 댓글들이 있었는데 그 나이 때 어린이가 좋아하는 건 장난감이 가미된 과자라고 한다.

그래도 그걸로 부족한 것 같다.

더 특별한 건 없을까? 며칠째 발을 동동 거리며 발품을 팔고 있던 나였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남편은 폴로 아웃렛에서 모든 선물을 사버렸다.

짧고 굵고 쾌적한 선물 준비였다.

가만 보니 상대방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것 같다.

싸게 샀다는 자기 욕망을 알뜰하게 충족시키며 만족해했다.

티셔츠를 깔 별로 사서 선물을 통일하는 남편을 보고

고민할 필요도 없고 가벼워서 들고 가기도 참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사서 이 고생이지?'

테트리스처럼 이리저리 케리어에 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이젠 '뭘 빼야 하지'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나를 보면서

남편의 방식이 내심 부러웠다.


남의 선물 사면서 알게 된 '업데이트된 내 취향'

'만나면 그냥 밥 사줘야지 하고 아무것도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

이방인의 기쁨 중에 하나가 고국방문 시 선물 고르기 같다. ‘이런 재미 아니면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이야?’

여름이 끝난 후 멕시코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언제나 승객의 짐이 오버 차지된다고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미어터지는 케리어를 이고 지고

‘어떤 걸 좋아할까?’ 고민하는 그 즐거움이 어쩌면 이방인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선물을 준비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새로운 나를 알게 된 순간이다.

정신없이 쇼핑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엉뚱한 게 있었다.

구찌 향수라니, 난 플로랄 향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니 플로랄  근처에도 안가는 내가! 선물을 고르느라 이것저것 구경하는 도중에  향수병 앞에 멈춰섰고 마치 예술 작품이 내게  위안 같은  얻었다. 보기만 해도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경험 자체를 요상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향수병 디자인에 반해 ' 이거 누구 사줄까?' 하며 그 앞에 한 참을 서있었다.

'그게 맘에 드는 건 나 자신인데 왜 다른 누구를 떠올리려 합니까? 나 자신이여!'

생화를 살 수 없는 상황에 이거 하나 올려놓으면 기분이 화사해질 거 같았다.

나 이런 거 좋아하네? 가 아니라 나 이런 거 좋아하게 됐네? 하며

나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남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살았다.

그 누구도 아닌 나자신을 위해 샀다.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기부니가 좋아져서 산다. 그걸로 족하다.

그 좋아진 기부니는 코로나 시대의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단단히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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