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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Nov 04. 2020

나 자신에게 변화를 선물하는 일

거래의 맛

내 인생은 중고거래 생활 전 후로 나뉜다.

그 전에는 동생이 집에 올 때마다

“언니 저장 강박 있어? 이것도 병이야”

물건을 다 이고 지고 사는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중고거래를 통해 죽어있던 내 물건들은 다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고

나는 비우면서 채우는 일에 더 신중해졌다.

중고거래는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일으켰다.

나에게 들이닥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복 입는 사람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 아저씨가 고집한 청바지에 블랙 목티처럼

나만의 유니폼을 입는다.

친구들은 교복이냐고 놀리지만,

원치 않은 교복을 고교 3년 내내 입은 적도 있는데

내가 고른 교복이라니 너무 신나잖아?


ss시즌 교복 고르는 중


 

집 밖의 유니폼도 중요한데 집안의 유니폼도 중요하다.

입기 싫어진 티셔츠를 잘 때 입고 자는 게 인생의 대부분이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집에선 늘어질 때까지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애매한 옷은 다 처분하고 내겐 파자마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판단은 모두 파자마를 입고하는 것 같다.     

인생에서 많은 중요한 만남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만남 1순위가 바로 인생 잠옷과의 만남이다.

내게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데,

베를린 cos 매장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내가 딱 원하던  잠옷을 발견했다.


보들 거리면서 살짝 바삭한 촉감과

은은한 물빛 블루 컬러와 적당히 여유로운 사이즈의 내 인생 잠옷.

드디어 우리가 만났군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달라졌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자동적으로 오늘 하루 내가 했던 거짓말들이 떠오른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거짓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나 자신한테 거짓말, 하는 순간 끝장이다.

나 자신을 속이려 했던 것들도 파자마를 입으면

끝끝내 속여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잠옷을 만난 후론 더 잠을 맛있게 자는 것 같다.

내일 하루의 밑그림도 더 잘 그려지는 것 같다.

내일은 나 자신한테 더 잘해주자. 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둘째, 부캐는 호빵맨이 되었다.     


당근마켓은 신용거래다.

물건뿐만 아니라 내 에너지까지 패키지로 주는 일이다.

절대로 상대를 손해 보게 하는 일은 하기 싫다.

내가 거래한 물건이 한 사람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

나를 믿어준 고마움에 조금 싼 가격을 정한다.

내 얼굴을 떼어내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호빵맨이 된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면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된 느낌이다.

행여 이상한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두려운 순간도 물론 있다.

그럴때 마다 내가 호빵맨이다 생각하면 분명한 용기가 샘솟는다.


이게 바로 내 거래가 성황리에 이뤄지는 이유, 내 영업비밀이다.

호빵맨에겐 그 몰입의 순간이 짜릿하다.

물욕 가득 찬 본캐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셋째, 더 이상 스타벅스 다이어리 노예가 아니다.     


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장을 받느라 커피를 사고 있지?

매해 연말마다 그러고 있는 이유가, 참으로 미스터리다.

막상 손에 넣고 나면 그다지 신나지도 않는데 굳이 왜?   

내가 왜 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지?


힘들게 구한 다이어리가 재구실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유치원 다닐 때처럼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일의 성과도 손에 만져지지 않자

나는 이걸로 내 존재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나의 성실함 그것들이 쌓여 다이어리를 받는다는 결과에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그건 아주 잠시 동안의 내 기분전환 도구였다.

몇 번의 중고거래를 거치면서

기분전환 도구 앞에서 애매한 마음이 없어졌다.

산다 만다가 명확해졌다.

나만의 필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듯이 물건과 인연을 맺는 일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결국,인생은 내가 사고 한 것들의 총합이니까.


낭비와 투자를 구분하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난 아무 생각 없이 숱하게 해왔던 헛짓거리를 청산했다.


산다, 만다 고민의 즐거움은 사라졌지만

만다의 단호함이 설렘을 끌어들인다.

비워진 만큼의 행운이 채워질 것 같은 요상한 예감이 든다.


당근마켓은 나자신에게

변화를 선물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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