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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n 25. 2021

헤맬수록 정확해지는 마음

둘러가는 만큼 다 우리꺼야


“와 오늘 아이스크림산 진짜 이쁘네,”

포틀랜드에선 뜨거운 여름에도

멀리 눈이 쌓인 후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그 산을 아이스크림 산이라 불렀다.

“지금 보러 갈래?”

즉흥여행을 워낙 좋아하는 우리들이라 갑자기 차를 돌린다.

꽂히면 곧바로 직진하는 에너지,

이때 눈에서 나오는 반짝임이 있다.

그 광선에 빠져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었다.


가다가 맥도널드에 들러 BTS 밀을 먹는다.

먹다 보니 눈산까지 갈 시간이 애매했다.

“그냥 공원이나 갈까?”

갑자기 근처에 갈만한 공원을 검색하고 다시 차를 돌린다.


Mt. Tabor park
SE 60th Ave & Salmon St
Portland, OR 97215
United State


사진 속 큰 호수가 빨리 보고 싶어 공원 지도부터 본다.

이 공원의 하이라이트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따라오라며 앞장선다.

내가 생각한 방향은 그쪽이 아닌데 엉뚱한 방향으로 날 이끌었다.

믿는 척 따라가 준다.

망했다. 가다 보니 핸드폰도 안 터지는 이상한 길이 나온다.

뒤돌아보니 다시 돌아 나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커다란 나무들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어 거인의 나라에 잘못 들어선 것 같다.

인간의 세계가 아닌 그 이외의 세계를 맛보는 느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토끼가 우리를 어떤 굴로 데려갈 것 같다.

마침 산악자전거가 우리를 역행하며 아슬아슬하게 획하고 스쳐 지나간다.

그때 일렁이는 바람이 날 다시 현실로 데려다준다.


나란히 걷다가 폭이 좁아지는 길에서 우리는 앞뒤로 걷는다.

이렇게 그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앞서 걷는 그의 작은 어깨를 본다.


그의 등에는 외로움이 묻어있다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흔한 쓸쓸함이 아니다.

그래서 나만이 지켜줄 수 있는 등짝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그 순간만큼은 담배 못 끊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

같은 고민을 들쳐 업고 나아가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더 이상 남자 친구가 아닌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는 건 어쩐지 슬픈 일이다.

남자 친구의 티셔츠를 입을 때와

남편의 티셔츠를 입을 때의 기분 차이만큼이나 크게 슬프다.

남자 친구 티셔츠는 날 설레게 하는데

남편의 티셔츠는 구질구질하면서도 요상한 안도감을 준다.


좁은 오솔길 끝에 나무로 뒤덮여 보일락 말락 하는 그건.

바로 테니스장이었다.

테니스 공이 라켓에 튕겨질 때 나는 경쾌한 소리를 좋아한다.

새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그 소리가 바람을 타고 에코로 번졌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쾅하고 터지는 반전처럼

내겐 그 테니스장의 존재가 충격적이었다.

전혀 테니스장 같은 게 있을 리 없을 곳이었다.

호수에 비친 눈부신 햇빛이 은은한 조명을 비추듯 신비로운 테니스장.

중학교 때 테니스 선수였던 그는 테니스라는 말이 나오면 말을 얼버무린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며.

전혀 특별하지 않는 그 이야기가 나에게는 작은 씨앗이 된다.

키에 비에 다리도 짧고 손과 발이 작은 신체를 가졌는데 어떻게 테니스를 잘 쳤을까?

(그렇다고 모든 신체 부위가 다 작은 건 아니랍니다)

그 미스터리를 언젠가 이 코트 장에서 그와 테니스를 치며 파헤치고 싶다.

이 바람과 이 햇살과 딱 오늘 같은 날씨 속에서.


이 풍경을 아이폰으로 담고 있는데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다.

바로 이 풍경을 즐기는 할머니다.

나무에 기대앉아 눈감고 있는 모습이

그 어떤 거창한 여행보다 지금 눈앞의 작은 순간이 소중해 보였다.

지금 오를 수 없는 큰 산을 동경하기보다는

자주 들락거릴 작은 동산을 가지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길 잃은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건 지옥의 계단이었다.

아직 내가 원하는 이 공원의 클라이맥스 호수는 나오지 않았다.

목적지와 반대로 내려왔기에 극기훈련 코스 같은 이 사악한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평소 쓰지 않는 종아리 근육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그제야 사진으로 본 웅장한 호수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얼음물을 원샷한 것처럼 머리가 시원했다.

역시 소중한 건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떨릴 때 봐야 제맛!

엉뚱하게 와버린 코스였지만 내겐 너무 완벽했다.

빙빙 돌아왔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만약 내가 리드해서 곧바로 이 호수로 직진했다면

이 모든 걸 몰랐을 거잖아.


공원을 빠져나오면서 보니까

내가 가려던 호수는 5분 만에 가는 지름길이 있었고

그 길은 너무 쉽고 어이없이 간단했다.


헤맨다는 거,

그 감각은 어떤 책이나 강의에서는 감히 배울 수 없는 희한한 것이었다.

갖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장착하고 나오는 초능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난 언제나 지름길을 알아내려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어쩌면 나 같은 직진형 인간에겐

곁길을 알려줄 가이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내 옆에 바로 있었는데 몰랐던 거다.


“직진으로 가면 가난해

둘러가는 만큼 다 우리 꺼야.”


실제로 하와이 여행 갔을 때

구글 지도에 볼록 튀어나온 뭔가가 신기해 보여서 바로 차를 돌렸다.

이때도 눈에서 광선을 뿜으며 그게 뭔지 궁금해서 발을 동동거렸다.

검문소가 있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미군부대였다.

다음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그 부대 해군이라면서 거길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이와 비슷한 일들이 사진첩에 많이 남아 있었다.

폭설이 내렸던 어느 겨울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놓치는 바람에

말도 안 되게 많은 별이 쏟아지는 스폿을 발견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을 놓았다.

우리에겐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눈부신 호화로운 선물이었다.


공원을 나오면서 남편의 부캐가 하나 더 탄생했다.

삼천포 가이드! 오늘의 발견이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은 엉뚱하게 곁길로 새는 걸 뜻한다.

시작은 아이스크림산이었으나 끝은 어디로 갈지 몰랐던 오늘처럼

앞으로도 엉뚱한 길로 날 데려가 줄 것이다.

재미없는 길로 서둘러 가기보단

천천히 돌아가기에 누릴  있는 짜릿한 순간들을 만끽하고 싶다.

헤멜수록 정확해 지는 마음이 여기 있다.



구불구불한 길은
사람을 결코 지치게 하지 않는다.
길마다 성격이 있고 영혼이 있다.
이 길에서 저길로 걸어 다니다 보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여행하거나
여러 친구와 어울리는 기분이 든다.
<천천히 스미는, 힐레어 벨록>



https://youtu.be/XncR1pPVa8s

마음껏 헤메버린 공원 브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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