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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n 30. 2021

잠깐의 거리를 둔다

각방의 맛

       

담배 때문에 각방 선언을 하고

그의 방문을 열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엄빠를 벗어나 처음으로 수학여행 가서 설렌 중2랄까?

감히 그의 얼굴에서 해방감이 느껴졌달까?

흥, 그 즐거운 표정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분명 어린애처럼 혼자서 뭘 하는 걸 싫어했다.

호캉스를 가도 난 혼자 수영장에 가서 책 읽기를 바랐고

그는 나를 졸졸 따라다녀서 짜증이 났었다.

급기야 늦잠꾸러기인 그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일찍 빠져나와 아침 산책을 하곤 했다.

오롯이 혼자 있을 때 나는 급속 충전이 되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알게 되다니!   

 

결혼했지만 여전히 혼자 있고 싶다.

잠들기 전, 유튜브 중독자인 우리들은 각자 최애 채널을 보는데

이때 오디오가 겹치서 한 사람은 에어 팟을 껴야만 한다.

물론 같이 최신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내 핸드폰으로 인스타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다.

이상하게도 붙어있으면 무뎌지고 게을러진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을 때 내 페이스를 찾은 것 같이 안심이 된다.    


45도까지 올라가는 폭염, 포틀랜드엔 에어컨이 필요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가만히 있어도 살이 찢어지는 듯 통닭구이가 된 기분이다.

잠들기 전 그가 내 방의 블라인드 각도를 바꿔주고

창문들을 더 활짝 열어젖히는 손길의 섬세함이 좋다.

부모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다.

이 순간만큼은 각방의 계기가 된 담배마저 고마워지면서

내 결핍을 채워주는 뜨거운 온기를 생생히 실감한다.


혼자 잠들지만 누가 우리 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오싹해질 일이

더 이상 없다는 안도감이 좋다.

가장 좋은 건, 먼 길 떠나는 사람들처럼 하는 뽀뽀다.

마지막 인사는 자주 해둘수록 좋은 것 같다.

난 이 리추얼에 집착한다.

요상하게 더 깊이 연결되는 느낌이다.

이걸 해야만 비로소 나만의 세계로 홀가분히 떠날  있을  같다.    


결혼생활이야 말로 각자의 동굴이 필요하고

상대가 나올때 까지 딴청을 피워야 한다.

기다린다거나 보채면 망하는 거다.


각자 방에서 일어난 아침

 “잘 잤어?”하고 생사를 확인하며 그가 웃는데

순간 “잘 있었어?”로 들렸다.

남편이 아니라 남자 친구처럼 느껴졌다.

결혼을 하면 보고 싶다는 애틋한 감정이 사라진다.

난 그게 결혼의 참담한 폐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방이 우릴 구원해 줬다.

잠시 서로의 곁을 떠나 있기에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기분이 좋다.   

 

각자의 방처럼 우리는 가끔 산책할 때도 각자의 코스로 걷는다.   


Tualatin hills park

15707 SW Walker Rd
Beaverton, OR  97006
United States

     

축구장, 농구장, 스케이트 보드장이 어우러진 공원이다.

나이키 본사 근처에 있어 우리는 그냥 나이키 공원이라 부른다.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동감이 무기력한 나를 깨운다.

각자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각자의 코스를 걷는다.    


혼자 걸을 때마다 그야말로 ‘혼자’라는 감각에 집중한다.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남편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나를 지켜주는 건 커리어뿐이다.

나는 언제든 돌아갈 수도 있으며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쿨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어야 한다.

코로나, 인종차별 그리고 내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어이없는 비자서류심사를

뚫고 여기에 왔다.

흔히 말하는 미줌마,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주하며 커리어가 단절된 여성이지만

나만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즐겁게 걸어가고 싶다.

나는 이 막막함을 나만의 산책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혼자 걸으며 혼자인 사람 관찰하기





처음부터 혼자 온 것과

같이 와서 각자의 코스를 걷는 건 다르다.     


각자 걷다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게 쏟아내는 질문 시간을 좋아한다.

그게 진짜 궁금해서가 방금 내가 알게 된 게 너무 신기해서 알려주고 싶어 서로 안달이 난다.

잠시 따로 보낸 시간에 들은 것들을 꺼내놓는다.

그는 요즘 탈북민들이 하는 유튜브에 꽂혀있다.    

“우리가 매일 먹는데 북한에선 못 먹는 게 뭔 줄 알아?”

“글쎄 커피 인가?”

 “계란”

“헐~언젠가 내가 시민권이라는 걸 따게 되면 우리 북한에 냉면 먹으러 같이 갈래?”

“북한에 에어비엔비도 있다던데? 우리 그럼 거기서 자는 거야?”

그러면서 어릴 때 <우정의 무대>를 보면서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는 곧 통일이 되기 때문에 오빠는 군대 같은 거 안 가게 될 거라고 장담했던 추억.    


다시 둘이서 한 바퀴를 더 걷는다.

도대체 이 시시껄렁한 대화가 앞으로 우리 인생에 어떻게 연결될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을 좋아한다.

각자 코스로 산책하기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기분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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