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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02. 2021

나는 그때 엄마가 되기로 했다

고유함을 빚어내는 일


시엄마가 전화기 너머로 울고 있다.

“우리 J는 애를 꼭 낳아야 해.”    


얼마 전부터 우린 아기 없이 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종종 했고

그 잠정적 결론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왠지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식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머리론 알면서

내 맘대로 안 되면 울게 될 것 같은 내 뻔한 미래.

그래서 나는 부모가 된 다는 게 두렵다.    


결혼 전 처음 시엄마가 했던 말이

 “너희 둘만 잘살면 된다” 였기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너희 결정을 존중한다.” 이런 말이었다.    


“저희는 샤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살 거예요”

“....”

“그러니까 평생 아이 없이 얽매이지 않고 산다고요.”    


요즘 내 기분은 아이를 낳아 보진 않았지만 아들이 생긴 것 같다.

내 삶은 이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낳기는 시엄마가 낳았지만 양육은 내가 하는 느낌 같다.

그는 초딩때 미국으로 이민 와,

몸은 커버렸지만 마음은 그때에 멈춰져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부분이 날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어른이 가질 수 없는 순수함에 놀라기도 하고

어떤 취약함을 내가 채워줄 수 있을 때 보호자의 느낌도 든다.    

결혼하고 3개월 만에 남편은 몸무게가 10킬로나 늘었다.

“나 두 그릇 먹을 거야.”라는 말에 성장기 부모 마음이 뭔지 알 것 같고

집안 곳곳에 뿜어 놓은 방구를 맡고  ‘아 이게 구수하다는 아기똥이구나’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다.

왜냐면 아이 앞에서 슈퍼 울트라 캡숑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 대신 나 자신을 키우기로 했다.    



부모가 될 수 없었다면
인생의 다른 목적을 찾아 즐겁게 살면 된다.
우리의 사명은,
각자 내린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풍요롭고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앨런 L .워커/아이 없는 완전한 삶>    

그 공원을 가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날 빨간 머리 아기 엄마는 공원에서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헤어 컬러가 확 튀어서 잔잔한 공원에 악센트를 찍는 느낌이랄까?

딱 보기에 학생처럼 어린 그 엄마 머리가 너무 특이해서

“아이 러브 유어 헤어스타일”

이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가 말을 걸었던 게 기억난다.

당연히 염색한 머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놀랐던 건 유모차 안에 있던 갓난쟁이 아기 머리카락이

엄마랑 똑 닮은 거였다.

아니 세상에! 감히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이 내린 시그니처였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얽매이고 싶어 졌다.

그 풍경이 나를 압도한 이유는

우리의 시그니처를 남겨야 한다는 계시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그 빨간 머리에 정신이 팔려 충동적인 결심을 하고

이 일을 후회하고 자식 바보가 되거나 노예가 될지라도

나는 그걸 해야만 한다. 아무도 날 막을 수 없다.    


모두가 자기만의 빨간 머리를 물려받고 태어난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애초의 선물 같은 것 말이다.

남편의 사르르 웃는 얼굴, 그것만이 날 구해주는 순간들이 있다.

배시시, 까르르, 빙그레, 생글생글, 하하하 가 아닌

밝은 쪽으로만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사르르다.

그 순간 세상을 밝히는 초능력 같은 거.

내 주변 나쁜 기운을 싹 걷어내고 투명한 보호막이 쳐지는 느낌이랄까?

남편의 아빠를 처음 본 날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사르르 웃음이 아빠를 쏙 빼닮은 것이다.

<힘센 여자 도봉순>처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 같아 보였다.

이 사르르 웃음의 대가 끊긴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내손으로 끊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쏙 빼 담는다는 감촉, 너무 아름답지 않나?

이 지구에 조용히 머물다가 사라 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떤 흔적을 구체적으로 남길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고유함을 빚어내는 일,

그 어떤 성취보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해볼 만 해


거기다가 지금 가장 궁금한 건

그의 웃음과 내 웃음이 섞인 아이는 어떻게 웃을까? 보고 싶어 미치겠다.

아마도 으랏차차사르르?




https://youtu.be/XZ885mnq5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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