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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05. 2021

파머스마켓의 사치 리스트

나를 돌보는 나만의 방식

    

포틀랜드로 이주하면서 가장 달라진 일상은

마켓 컬리 포장 지옥에서 벗어나

파머스 마켓에서 내 손으로 직접 제철과일을 고르는 거다.    


태어나보니 우리 부모는 과일을 늘 궤짝으로 사다 먹는

과일계의 큰손이었다.

우리 집 주식은 쌀이 아니라 제철과일이었고

엄마는 반찬보다 과일이 떨어지지 않게 더 신경 썼다.

아빠 기분은 최근에 사 온 사과박스 상태에 따라 달라졌다.

속까지 맛있으면 뛸 듯이 좋아했고

혹시라도 썩은 게 있으면 사기당한 것처럼 속상해했다.

아빠는 지금도 어느 집 두리안이 젤 맛있는지 멈추지 않고 찾아다닌다.    


PSU Farmers Market
1831 SW Park Ave
Portland, OR 97201
United States


PSU 공원을 가로지르며 파머스 마켓은 매주 토요일에 열린다.

내가 좋아서 내 발길이 닿는 대로 흘러가지만 토요일은 결국 여기다.    

별다른 계획 없이 가지만 이곳에 오면 호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포틀랜드에 산지 30년이 넘는 남편은 매주 똑같은 곳을

매번 지겹게 가냐고 묻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니, 난 기대돼, 그것도 아주 많이’    

이곳의 나무들은 매주 다른 빛깔의 옷을 갈아입고

이번 주는 피오니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다음 주에는 살구가 새롭게 나왔다.

그리고 피치 도넛이, 선샤인 라즈베리가 줄줄이 나온다.

제철을 맞은 것들이 신상으로 도착하는데

난 갓 도착한 그 냄새를 맡으러 간다.

피치 도넛을 한입 베어 물면 크리스피 도넛 뺨치게 달달하다.

설탕 바른 도넛보다 더 맛있는 이유는 바로 손에 묻는 향이다.

빵맛이 빵 냄새를 이길 수 없듯이

손 끝에 스치는 작은 계절감각이 모든 걸 압도한다.

마스크를 뚫고 내 코를 장악하는 이 향긋함을 맡을 때

대자연 속에 있는 소속감이 생긴다.     


이 지역에서 자란 농작물이라 오다가 멀미할 일 없어 모두 싱싱하다.

환경 친화적인 농장들에서 직접 길러낸 허브와 식물..

여기까지 따라온 무당벌레에게서 끈질긴 강인함을 배운다.

그래, 이 마인드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    

그동안 살구향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가까이 가면 살짝만 건드려도 공기 중에 퍼진다.

살구를 고르다 안쪽에 있는 걸 굳이 꺼내보겠다고 와르르 무너뜨린다.

이유는 상처 난 아이를 찾아서다.

수박을 살 때 남편은 매끈한 것보다 상처 있는 걸 고른다.

신기한 게 그 상처 주변은 훨씬 아삭하고 달콤하다.

그 상처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흔적처럼 보인다.

상처라는 건 결국 무너지지 않고

이겨냈다는 증거니까,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니까

그 점이 왠지 우리와 닮은 것 같아 상처를 만지며 우리를 비춰보기도 한다.    


거제도는 유자가 특히나 맛이 좋은데

그 이유가 거친 해풍을 맞고 자라서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사람이나 식물이나 만물에게 최고의 원동력은 결핍 같다.

에너지라는 건 결국 결핍의 구멍에서만 차오르는 거 아닐까?

우리는 가끔 서로의 결핍에 대해서 내기하듯이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놀란다. 아니, 아직도 새롭게 나올 에피소드가 있어?    

소풍날, 일하는 엄마였기 때문에

전날 서브웨이에서 산 샌드위치를 들고 갔다던 남편.

식은 건 물론이고 친구들 엄마가 싸준 온기 있는 도시락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남편은 야외에서 무언가를 먹는 걸 싫어한다.

어느 날 햄버거를 사서  공원에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남편은 햄버거가 식으니까 가는 차 안에서 먹자고 했다.

(가기 싫은 소풍을 억지로 간 소년의 표정을 지으며)

나는 식더라도 공원의 풍경 속에서 여유롭게 먹고 싶었다.

이런 히스토리 덕분에 그는 갓 지은 밥에 집착하고 먹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메뉴판을 볼 때 가격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볼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마찬가지로 난 이 파머스 마켓에서 내 이민생활의 자양분을 얻기 때문에

여기서 만큼은 완벽하게 사치한다.

구경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넉넉하게 사다 나르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파머스 마켓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제철 과일과 더불어

갓 구운 호밀빵이다.

오레곤 소금은 특히나 유명한데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빵맛이 다르다.

파머스 마켓에서 산 식재료는 방부제가 없기에 빨리 상한다.

커팅해서 냉동실로 들여보낼 때 눈을 질끈 감는다.

보통은 치즈를 얹고 전날 산 과일을 올려 오픈 샌드위치로 먹는다.

호밀빵을 바삭하게 굽고 있는데

갑자기 한인마트에서 산 꽈리고추 멸치볶음이 생각이 났다.

후다닥 꺼내서 바로 빵 위에 토핑 했다.

파리에서 먹었던 앤초비 바게트 느낌이 나버렸다.

고소하고 바삭한 빵 위에 깊은 감칠맛, 뒤끝은 어렴풋이 맵싹 한. 그래 이 맛이야

포틀랜드와 한국의 콜라보 아침이 탄생해 버렸다.


가끔 이런 식으로 영감이 번뜩 떠오른다.

머리로 상상해보고 실제로 실행해보는 것에는 리스크가 따르지만

요리만큼은 누구의 개입도 없이 나 스스로 망하고 흥할 수 있어서 좋다.

그 뒤로 나는 그 재미에 푹 빠져 그냥 생각나는 것들을 조합해 봤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연결하는 감각을 계속 연마해 나가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툭하고 튀어나와 날 놀래켜 주길!                


https://youtu.be/p4EDNgmQuJo

파머스 마켓 브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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