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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08. 2021

이민 와서 알게 된 뜻밖의 진실

프로큰일러의 필수품

홍진경이 예전에 욱해서 그냥 파리 유학 간다고 말을 해버렸는데

진짜 그 말 때문에 짐 싸서 파리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다르게 버무려버린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넌 큰일 할 사람이잖아.”라며 나를 찼는데

그 말이 나를 평생 따라다닐 것을 직감했다.

내 눈엔 정말로 큰일을 하는 사람이 나에게 그런 어이없는 말을 한다는 게

날 비웃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내 뇌에 새겨져 그날 이후로 나는 큰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왠지 죽기 전에 “봤어? 내가 한 큰일,

이게 다 당신이 그때 한 그 말 때문이야”라고 증명해야

그의 말이 비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큰일이란 무엇인가?

라고 소크라테스가 물을 것이다.

큰일의 정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걸 골라야 한다면

더 두려운 일을 고르면 된다.

결국 큰일 이즈 개고생!

개고생은 사서 해야 제맛이라던가?

그날 이후로 나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늘 더 두려운 쪽으로 왔고

그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     


커리어 좀 진득하게 쌓다가 이제 꿀맛 좀

보려 했는데 다시 개고생의 길로 들어섰다.

정작 작은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큰일을 벌이고 싶은 보통 나부랭이다.

그렇다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성급하게 구입한 첫책상 feat.이케아
아마존 창업 당시 CEO책상 (출처: 구글이미지)

첫째, 책상을 들인다.

미국에서 큰일을 한 사람 스티브 잡스에겐 작은 차고가 있었다.

차고는 내게 너무 사치라 전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로 롤모델을 바꾸었다.

미국 이민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내 책상을 고르는 일이었다.

책상은 나만의 안전 기지였고

여기에 앉으면 너무 빨리 오전에서 오후가 됐다.

포틀랜드엔 좋은 카페나 갈 곳이 널렸지만 이 책상에서 하루를 오롯이 쓴 적도 많다.

나는 거기서 앉아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을 생생히 지켜봤다.

말 그대로 큰일을 해낸 윤여정의 인터뷰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건 ‘연습’이었다.

그러나 내겐 아무리 연습을 해도 잘 안 되는 게 정리정돈이었다.

밤마다 남편이 내 책상을 치워주는데 거기서 요상한 희열을 느꼈다.

깨끗한 책상은 나를 서포트해주는 가장 확실한 물건이었다.  

   

결혼 증명서를 받으러 관공서에 갔을 때 내 직업을 써야 했다.

그런데 남편이 아무 생각 없이 하우스와이프라고 써서

그 찰나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통해 나에겐 나의 성취를 이룰 직업의 존재가 가장 시급하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내 1차 목표, 언어 독립이 정해졌다.

정하긴 했으나 틈만 나면 남편에게 싸움을 걸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개수작도 펼쳤다.

아직까지는 한국방송작가 저작권료가 입금된다.

내가 쌓아 온 생활들이 아직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준다.

가끔은 언제든 돌아가도 괜찮다는 열린 가능성이 날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일기장에 적는다. 윤여정, 연습, 영어     

결혼사진 대신 손편지 액자

둘째, 손편지 액자를 만든다.    

이민 오면서 알게 된 뜻밖의 진실이기도 한데

나는 너무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그걸 그때는 몰랐는데

 공간에서 빠져나와보니  선명하게 보였다.    

일부러 구분하지 않아도

진짜 내 사람만이 자연스레 남았다.

바다 건너 무조건 나를 지지해 주는 존재 가 있다는 확실한 감촉.

친구들의 손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내 앞의 장애물을 다 치워줄 것 같은 부적처럼 느껴진다.

손 편지는 거들뿐, 너무 두둑한 현금과 함께여서 더 목이 메었다.

달러로 일일이 바꿔서 준비한 정성에, 나 생각보다 괜찮게 살았던 거야? 싶었다.

그 현금은 주식으로 극진히 모셔두었고

먼 훗날 내 주식 실력을 자랑질하며 이 친구들에게 보답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손편지는 손편지로 밖에 보답할 길이 없다.

아직 그 답장은 쓰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두려운 쪽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그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확장시켜줬고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더라고.

여기 와서 영어와 운전 그리고 막막한 밥벌이에 도전하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되었어.

작은걸 지키려 안전한 곳에 있지 말고

두려운 곳으로 우리를 계속 내보내자고

내 소중한 친구들에게 말하게 될 것 만 같다.      


그렇게 답장을 해야 하기에 나는 그렇게 살아낼 수밖에 없다.    

가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 꺼내 보곤 했는데

그냥 결혼사진 넣을 액자로 사둔 것에 크게 걸어 놨다.

매일매일 이 응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셋째, 모카포트로 바꾼다.    

아직 사들이진 않았는데 계속 이리저리 모델을 고르는 거 보니

조만간 사들일 기세다.

커피를 즐기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나는 주로 핸드드립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마셔왔다.

커피 천국 포틀랜드는 로컬 커피 종류가 너무 많아서 선택의 곤란함이 있다.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한참 헤매다 정착한 것이

트레이더 조의 유기농 커피다.

포인트는 커피가 떨어지는 시점에

새로운 블렌딩이 나오는 그 타이밍이다.

산미가 있고 없고 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커피 원두의 신선함이 좋다.    

모카포트의 매력은 소리를 내면서 끌어 오른다는 거다.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는다는 간단한 원리를

커피를 만들면서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다.

그 순간 나는 커피가 된다.

매일 티가 나지도 않는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끓으려면 100도가 되어야 한다.

알고는 있는데 자주 까먹고 산다.

그 100도 정신을 내 생활 속에 두고 싶다.

그래서 커피를 준비할 때마다 혼자 다짐할 수 있을 것 같다.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방법으로

내가 나를 극진히 대접하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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