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더의 옷장
올블랙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만 찍는
정신 나간 여자가 있다.
그 찰나를 놓칠세라 눈에 보이면 미친 듯이 따라간다.
그 여자가 바로 나고 이게 최근에 생긴 내 요상한 습관이다.
왜 찍냐고? 너무 예뻐서 나도 따라 하려고
예전에는 화장을 하고 무언가로 나를 더하고 치장해야 이쁜 줄 알았다.
지금은 올블랙 스타일이 내 최애다. 마이너스가 예쁘다.
특히나 포틀랜드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요즘 내 눈에는 그런 사람들만 보인다.
올블랙을 입으면 블랙의 가치를 안다는 점에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관찰하다 보니
그 친구들에게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몸매에 에너지가 있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온몸이 말해주고 있다.
단순히 날씬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탄탄함이다.
둘째 머릿결이 반지르르하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블랙은 거들뿐, 머릿결이 눈부시게 빛난다.
셋째 피부가 맑다.
다른 화장품이 필요 없어 보인다.
주근깨 까지도 스타일리시하다.
결론적으로 올블랙 스타일은 꾸안꾸계의 최고봉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몸매, 머릿결, 피부만으로도 완벽하다.
왜 이제야 이걸 깨달은 거지?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포틀랜드의 멋이다.
내 옷장에서 컬러가 들어간 옷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나이키나 룰루레몬의 블랙 운동복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중학교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항상 블랙 옷만 입었었다.
난 그때만 해도 블랙 옷만 입는다는 거 너무 지겹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양한 컬러를 쓰는 선생님에겐 그 옷이 제복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컬러에 대한 예의 같은 거.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블랙을 입었을 때 자연에 있는 컬러들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내가 좋아하는 컬러들은
햇살을 머금은 뜨거운 오렌지
낮 12시 잔디의 연두
살짝 노르스름한 선샤인 베리
약간 덜 익는 분홍빛 수박
단 한 번도 겹친 적 없는 제각각의 초록나무들
그리고 길가에 핀 꽃의 모든 컬러들
그날의 햇살과 공기에 따라 달라지는
포틀랜드만이 독보적으로 자아내는 컬러가 있다.
감히 컬러가 있는 옷을 입으면 그것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진짜 앞에서 가짜를 입은 느낌이 든다.
이 자연 속 진짜 컬러를 만끽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동안 몸을 치장하는데 돈과 시간을 썼다.
결국 타인의 시선을 위해 내가 한 헛짓거리다.
하루종일 나는 어떤 기분을 입을 것인가?
이 중요한 질문을 이제야 마주한 거다.
지금처럼 내 몸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왜? 모두가 꾸미며 사는 세계에 살았으니까
다 큰 성인이 큰 옷을 입은 걸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세탁소에서 급하게 빌려 입고 온 건지
그가 걸치고 온 헐렁한 양복에 기가 막혔다.
그 양복의 찌질함에 어쩐지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내 고딩시절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난 키가 더 크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복을 두 치수나 크게 맞췄다.
3년 내내 두 번 접어도 돌아가 버리는 교복을 입고 다닌 쭈구리가 바로 나다.
그 시절 내 친구들 모두가 그러고 다녀서 그게 이상한 줄 조차 몰랐다.
그게 우리가 사랑했던 시대정신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양복은
왠지 그런걸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날 그걸 입은 요상한 남자가 내 인생에 개입하면서 내 옷장까지 바꾸어 놓았다.
옷을 향한 내 가치관이 선명해지니
옷을 고르는 일도 심플하고 명확해졌다.
세일 중이니까, 나중에 입을 옷은 사지 않는다.
지금 바로 내 생활을 서포트해주는 블랙 운동복을 산다.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돈 들여가며 싸들고 온
컬러풀한 옷들은 버려야 했다.
나는 이걸 버리면서 진짜 중요한 걸 얻었다.
예전에는 옷을 고를 때 디자인만 봤는데
지금은 감촉에 집중한다.
올블랙은 설명할 순 없지만
확신에 차 있는 몸짓이다.
주변을 제압하는 장악력이 느껴진다.
올블랙을 입을 수록
내 인생에도 어떤 확신이 만들어져 나아가는 것 같다.
결국 이게 나만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금 이 감각이 소중하다.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세이 미야케 검정 목티의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아 보충 요청을 할 때
감촉을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 갖고 있는 터틀넥의 색과 촉감,
특히 소매를 걷어 올렸을 때의 느낌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동일한 제품이어야 한다.”
올블랙 패션이 내 일상에 들어오면서
진정한 감촉의 맛을 알게 되었다.
잡스가 입은 블랙 목티의 구체적인 감촉이
궁금해졌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