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Jul 12. 2021

내 교복은 나이키 올블랙

포틀랜더의 옷장

올블랙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만 찍는

정신 나간 여자가 있다.

그 찰나를 놓칠세라 눈에 보이면 미친 듯이 따라간다.

그 여자가 바로 나고 이게 최근에 생긴 내 요상한 습관이다.

왜 찍냐고? 너무 예뻐서 나도 따라 하려고     

말해모해 올블랙의 아름다움

예전에는 화장을 하고 무언가로 나를 더하고 치장해야 이쁜 줄 알았다.

지금은 올블랙 스타일이 내 최애다. 마이너스가 예쁘다.

특히나 포틀랜드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요즘 내 눈에는 그런 사람들만 보인다.

올블랙을 입으면 블랙의 가치를 안다는 점에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관찰하다 보니

그 친구들에게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몸매에 에너지가 있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온몸이 말해주고 있다.

단순히 날씬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탄탄함이다.  

   

둘째 머릿결이 반지르르하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블랙은 거들뿐, 머릿결이 눈부시게 빛난다.     


셋째 피부가 맑다.

다른 화장품이 필요 없어 보인다.

주근깨 까지도 스타일리시하다.     


결론적으로 올블랙 스타일은 꾸안꾸계의 최고봉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몸매, 머릿결, 피부만으로도 완벽하다.

왜 이제야 이걸 깨달은 거지?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포틀랜드의 멋이다.

내 옷장에서 컬러가 들어간 옷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나이키나 룰루레몬의 블랙 운동복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중학교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항상 블랙 옷만 입었었다.

난 그때만 해도 블랙 옷만 입는다는 거 너무 지겹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양한 컬러를 쓰는 선생님에겐 그 옷이 제복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컬러에 대한 예의 같은 거.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블랙을 입었을 때 자연에 있는 컬러들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내가 좋아하는 컬러들은     


햇살을 머금은 뜨거운 오렌지

낮 12시 잔디의 연두

살짝 노르스름한 선샤인 베리

약간 덜 익는 분홍빛 수박

단 한 번도 겹친 적 없는 제각각의 초록나무들

그리고 길가에 핀 꽃의 모든 컬러들     

포틀랜드만의 컬러

그날의 햇살과 공기에 따라 달라지는

포틀랜드만이 독보적으로 자아내는 컬러가 있다.

감히 컬러가 있는 옷을 입으면 그것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진짜 앞에서 가짜를 입은 느낌이 든다.

이 자연 속 진짜 컬러를 만끽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동안 몸을 치장하는데 돈과 시간을 썼다.

결국 타인의 시선을 위해 내가 한 헛짓거리다.

하루종일 나는 어떤 기분을 입을 것인가?

이 중요한 질문을 이제야 마주한 거다.


지금처럼 내 몸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왜? 모두가 꾸미며 사는 세계에 살았으니까     


다 큰 성인이 큰 옷을 입은 걸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세탁소에서 급하게 빌려 입고 온 건지

그가 걸치고 온 헐렁한 양복에 기가 막혔다.

그 양복의 찌질함에 어쩐지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내 고딩시절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난 키가 더 크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복을 두 치수나 크게 맞췄다.

3년 내내 두 번 접어도 돌아가 버리는 교복을 입고 다닌 쭈구리가 바로 나다.

그 시절 내 친구들 모두가 그러고 다녀서 그게 이상한 줄 조차 몰랐다.

그게 우리가 사랑했던 시대정신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양복은

왠지 그런걸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날 그걸 입은 요상한 남자가 내 인생에 개입하면서 내 옷장까지 바꾸어 놓았다.     


옷을 향한 내 가치관이 선명해지니

옷을 고르는 일도 심플하고 명확해졌다.     

세일 중이니까, 나중에 입을 옷은 사지 않는다.

지금 바로 내 생활을 서포트해주는 블랙 운동복을 산다.     

올블랙 생활인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돈 들여가며 싸들고 온

컬러풀한 옷들은 버려야 했다.

나는 이걸 버리면서 진짜 중요한 걸 얻었다.     

예전에는 옷을 고를 때 디자인만 봤는데

지금은 감촉에 집중한다.


올블랙은 설명할 순 없지만

확신에 차 있는 몸짓이다.

주변을 제압하는 장악력이 느껴진다.

올블랙을 입을 수록

내 인생에도 어떤 확신이 만들어져 나아가는 것 같다.

결국 이게 나만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금 이 감각이 소중하다.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세이 미야케 검정 목티의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아 보충 요청을 할 때

감촉을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 갖고 있는 터틀넥의 색과 촉감,

특히 소매를 걷어 올렸을 때의 느낌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동일한 제품이어야 한다.”

어쩌다 보니 나의 패션 선배가 된 잡스

올블랙 패션이 내 일상에 들어오면서

진정한 감촉의 맛을 알게 되었다.

잡스가 입은 블랙 목티의 구체적인 감촉이

궁금해졌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민 와서 알게 된 뜻밖의 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